'기레기'는 개인적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18. [생각하다] - 제도화된 선택·강조·배제의 원칙

by 송승환

기사 같지 않은 기사를 썼을 때 시민들은 기자를 '기레기'라고 욕한다. 기자와 쓰레기를 합친 말인데 정말 절묘하고도 뼈아픈 표현이다. 나도 기레기 같은 기사를 써본 경험이 있다.


기자에게 가장 힘든 일은 발제다. 아침마다 무엇을 쓸 것인지 보고하는 것을 발제라고 하는데, 매일매일 쓸 거리가 많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매일 잠들기 전 침대에서, 아침에 씻으면서, 그리고 발제 마감을 앞둔 몇 분 동안 머리를 쥐어짜게 된다. 거꾸로 발제거리가 있는 날은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당당할 수가 없다.


정치부 막내 기자로 있던 어느 날 발제 거리가 없어서 고민 중일 때 한 선배가 기사거리 하나를 던져줬다. 이번 선거에 유력 정치인의 아들 A씨가 나올 수도 있다고 하니 그 내용을 써보라는 거였다. 발제 마감까지 시간이 남아서 A씨에게 전화를 해봤다. A씨는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딱 잘라서 말했다. 선배에게 "그건 가능성이 없어서 발제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그 선배는 그래도 발제를 하자고 했다. "정치인의 말은 100%라는 게 없다. 정치를 안 하겠다고 말한 사람 중에 결국 한 사람이 얼마나 많냐"면서 등을 떠밀었다. 결국 이 발제는 채택이 됐고, 그날 그 기사를 쓰게 됐다. 하지만 A씨는 그 해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틀리게 됐다고 나쁜 기사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A씨가 출마 의사가 없다는 걸 알고도 마치 출마할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썼던 그 기사는 분명 나쁜 기사였다.


기자가 발제를 하면 그 아이템은 채택 혹은 누락이 된다. 채택되면 본격적인 취재를 거쳐서 기사를 작성하게 되는 것이고, 누락은 아이템이 '킬'(kill)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사의 아이템 발제와 채택, 누락은 절대 개인적이지 않다. 그 언론사의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 목표를 지면(방송의 경우 큐시트)에 가장 돋보이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오래된 관행과 제도에 따라 결정된다.

워싱턴포스트 편집회의.jpg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편집회의 장면

기자들은 이 채택과 누락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거치면서 언론사의 방향성을 학습하게 된다. 언론사의 방향과 맞지 않는 소재를 발제하면 100이면 100 누락된다. 기자들은 누락되지 않기 위해 잘 채택되는 아이템을 찾아서 발제하게 되고,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점점 그 언론사의 관행과 제도를 학습한다.


이 때문에 기레기는 기자 개인의 잘못도 있지만 속한 언론사의 제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언론사의 제도는 무엇을 선택하고, 강조하고, 배제할지 결정한다.


언론사의 이런 관행과 제도는 변화하고 있지만 속도가 매우 느리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언론을 제대로 감시하는 견제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과거엔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권력이 언론에 있었기 때문에 언론을 견제하는 목소리를 키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여론을 좌우하는 키는 대중과 다른 미디어 플랫폼에 넘어갔다. 얼마든지 언론의 변화를 요구하고 공론화를 할 수 있는 채널이 늘어났다. 기레기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을 넘어서서 언론의 관행과 제도를 이해하고 문제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성장해야 '제도화된' 기레기의 탄생이 줄어들 것이다.


이 내용은 책 <기레기를 피하는 53가지 방법>에 담긴 글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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