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만나다] - 가장 상징적인 인물을 만나자
길지 않은 기자 생활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국정농단 사건 특검' 취재였다. 세 달 가량 숨 가쁘게 돌아가는 수사 상황을 따라 취재하면서 하루도 제대로 못 쉬었지만, 이 때 겪은 일들은 아직도 술자리에서 꺼내면 몇 시간을 우려먹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안주거리가 됐다.
선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보이는 대치빌딩의 2층 주차장은 언론사 특검취재팀의 막내 기자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다. 최순실씨,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 국정농단 사건의 등장인물들이 조사를 받을 때 이곳에 만들어진 포토라인을 거쳐 들어갔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24시간 이곳을 지키면서 들어오고 나가는 이들을 붙잡고 질문을 했다.
2017년 1월 25일 오전, 구치소에 있던 최순실씨가 특검 조사를 받기 위해 대치빌딩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최씨는 포승줄에 묶인 채 걸어오다가 생중계하는 방송 카메라를 발견하고서 소리쳤다.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 어린 손자까지…"
말을 이어가려던 최씨를 가로막은 건 인파 속에서 튀어나온 예상치 못한 목소리였다.
"염병하네! 염병하네! 염병하네!"
최씨의 입에 쏠릴 뻔했던 관심은 순식간에 '염병 삼창'으로 뒤집어졌다.
'염병하네'의 주인공은 대치빌딩의 청소노동자 임애순씨였다. 임씨는 서울 봉천동에서 40년째 살고 있는 60대 여성이다. 서울관악고용보험센터에서 일자리를 소개 받아 특검 사무실을 청소하게 됐다. 임씨는 첫 출근을 하는 날 대치빌딩 입구에 경찰이 서 있기에 '무슨 일이냐' 물어보고선 여기가 특검 사무실이란 걸 알게 됐다.
최순실씨가 온 그날도 임씨에게는 평범한 하루였다. 아침 청소를 마치고 잠깐 쉬고 있는데 곧 최씨가 온다기에 주차장으로 구경을 나갔다. 최씨가 민주주의를 운운하며 소리치는 모습을 보자, 임씨는 자기도 모르게 분한 마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염병하네!"
평범했던 임씨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됐다. 이날 많은 매체에서 임씨의 '사이다' 발언을 조명했다. 그 뒤 임씨는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의 연단에도 올랐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게 겁이 났지만 아들이 "내가 손을 잡고 같이 가겠다"라고 하는 말에 용기를 냈다.
2월 하순, 수사 기간을 늘려달라는 특검의 요청을 황교안 총리가 거부하면서 특검취재팀도 마무리 준비에 들어갔다. 약 세 달의 특검 수사 기간을 정리하는 기획을 하면서 내가 맡은 건 상징적인 인물의 인터뷰 기사였다.
쉽게 떠오르는 건 박영수 특별검사나 패션 센스로 유명해진 이규철 대변인이었다. 하지만 특검팀은 사안이 엄중한 만큼 어느 언론사와도 인터뷰를 일절 하지 않겠다고 했다. 국정농단의 피해자를 섭외해볼까도 했지만 사건 전체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그때 특검취재팀장 L선배가 떠올린 인물이 임애순씨였다. 임씨는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특검수사팀을 관찰한 사람이다. 특검 사무실이 있던 대치빌딩 17~19층은 출입이 통제돼 기자들도 들어갈 수 없었지만, 임씨는 매일 그곳을 드나들었다. 임씨가 수사 상황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온 국민이 관심을 갖는 사건인 만큼 평범한 임씨의 시선이 더 특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임씨를 쫓아다녔다. 지하 4층 휴게실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자고 졸랐다. 임씨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임씨가 주목을 받고나서부터 소위 '친박 세력'이 그를 괴롭혀온 것이다. 그들은 임씨가 '광주 5·18 민주화 유공자 가족'이라거나 전문 시위꾼이라는 등의 가짜뉴스를 퍼뜨렸다.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임씨는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렇게 모함까지 하냐"면서 억울해 했다.
임씨를 간신히 설득해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는 예상대로 평범하지만 특별했다. 임씨의 눈엔 특검팀의 애환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밤새 일 하고 코피를 쏟아서 화장실로 달려온 검사, 추위에 떨며 출입문을 지키던 의경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아들처럼 안타까워했다. 이규철 특검보가 양치를 하다가 칫솔을 빼고 90도로 인사를 했다며 깔깔 웃었다. 광화문광장의 많은 시민들 앞에서 누구나 한 마디 할 수 있다고 느꼈을 때 민주주의를 온몸으로 체험했다고 말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만해지고, 우리 아이와 손자가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인터뷰 기사는 대박이 났다. 비상식적 범죄 사실이 연일 시민들에게 충격과 우울함으로 다가오던 시기에 임씨의 상식적인 이야기가 공감과 위로를 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터뷰 기사는 적절한 인물을 섭외하는 게 준비의 8할이다. 시민들이 지금 가장 만나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을 찾아서 만났다면 절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내용은 책 <기레기를 피하는 53가지 방법>에 담긴 글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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