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찾다] 대형 사건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너는 앞으로 서초경찰서 2진 기자실에서 자면 된다."
수습 기간 나를 관리한 1진 기자 L선배는 2016년 5월 16일 밤 전화로 첫 지시를 했다. 기자들은 서열 순서를 진(陣)으로 표현한다. 보통 지시를 하는 쪽이 1진, 받는 쪽이 2·3진이다. 중·고등학생 때의 '일진'과는 다르지만 나쁜 면만 보면 얼추 비슷하다.
기자는 언론사에 입사한 뒤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면 보통 사회부에 수습기자로 배치된다. 당시 중앙일보 사회부는 사건팀(중앙일보에선 '이슈팀'이라고 부른다), 법조팀, 서울시청팀으로 나뉘었다. 나는 검찰과 법원을 담당하는 법조팀에 먼저 배치됐다.
법조팀 L선배가 원래 나를 그날부터 경찰서에서 자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전날 사건팀 회식 때 정장 차림으로 간 게 화근이었다. 법조팀의 출근 옷차림에 맞게 정장을 입었을 뿐인데 당시 캡(사건팀장)이 나를 보더니 한 마디 했다. "네 동기들은 거지꼴인데 너는 좋아 보인다?" 그날 밤 캡은 L선배에게 전화해서 나도 마찬가지로 경찰서에서 생활하도록 시켰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17일 밤늦게 서초경찰서의 2진 기자실에서 짐을 풀던 중 L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거기에 오늘 살인범 한 명이 잡혀 왔거든? 살해 동기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중에 뭐가 더 문제겠냐?"
갑작스런 질문에 하나를 찍었다.
"없는 쪽이요."
"왜 그렇게 생각하냐?"
"음... 동기가 있다면 끝난 사건이지만 없다면 또 다른 범행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살해 동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알아와라."
전화를 끊고 나는 그의 지시를 가볍게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서울 한복판에서 알려지지 않은 살인 사건이 하루에 한두 건씩은 있는 줄 알았다. (실제로 그렇진 않다.) 형사과장의 방을 기웃거렸지만 물어볼 용기도 의지도 없었다. 대충 "확인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하고 선배에게 핀잔을 몇 마디를 들었다. 그리고 2진 기자실의 냄새나는 침낭 속으로 들어가 푹 잤다.
<“여성이란 이유로…묻지마 아닌 ‘여혐’ 살인”> 다음날 아침 한 신문의 사회면 톱기사 제목이었다. 그날부터 강남역엔 분노와 추모의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의 물결도 거세졌다.
서초경찰서에서의 첫날 밤, 내가 사소하게 흘려보낸 사건은 '강남역 살인 사건'이었다. 한국 사회에 한 획을 긋는 순간은 이렇게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 그날 밤은 앞으로 기자 생활에서 어떤 사건도 소홀히 보지 않아야겠다고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 날이었다.
이 내용은 책 <기레기를 피하는 53가지 방법>에 담긴 글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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