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만나다] - 누구나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너는 내일 첫 차로 파주에 가라. 가는 길엔 홍만표에 대해서 공부하고."
수습기자 시절, 서초경찰서 2진 기자실의 침낭과 한 몸이 되려던 새벽 2시에 L선배는 전화로 다음날 취재 계획을 알려줬다.
홍만표 전 검사장은 2016년 법조비리 사건으로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한 사람이다. 잘 나가는 검사였던 그는 2011년 변호사 개업을 한 뒤 2012년과 2013년에 각각 100억원에 가까운 소득을 신고했다. 전관예우를 이용해 검찰 조사를 받는 범죄 혐의자의 편의를 봐주고 큰돈을 받은 의혹을 받았다. 수임 신고를 하지 않고 몰래 변론을 해 세금을 축소한 혐의도 있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구속됐고 법원에서 조세포탈 등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튿날 새벽, L선배는 파주의 한 사무실 주소를 보냈다. 검찰이 며칠 전 압수수색한 부동산업체의 홈페이지에 나온 위치라고 했다. 이 업체가 홍만표 변호사가 전관예우로 몰래 번 돈을 관리하고 있을 것이란 추측이었다. 직접 찾아가서 사실인지 확인해보란 것이다.
황당한 지시였다. 새벽부터 헛걸음을 하는 게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선배의 추측대로라면 이 부동산업체는 어차피 홍 변호사와 한 패인데 기자가 가서 물어본들 자신들에게 불리한 말을 해줄 리가 없었다. 용기를 내 선배에게 묻자 또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누구나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걸 건드려봐라."
선배가 알려준 주소를 찾아가보니 유령 사무실이었다. 간판은 있지만 문 앞에 오래된 우편물들이 쌓여 있었다. 실눈을 뜨고 문틈으로 내부를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옆 사무실로 출근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물어보니 그 방에 사람이 드나드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건물을 샅샅이 뒤져보니 이 사무실과 관련된 휴대전화 번호를 하나 구할 수 있었다. (취재원 보호를 위해 자세한 과정을 쓸 수 없음을 양해 바란다.) 전화를 걸자 상대방은 의외로 전화를 받았고, 순순히 나를 만나주겠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주소 몇 군데를 알려줬다.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니 소유주에 홍 변호사와 그의 아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단독] 홍만표 오피스텔 50채, 부인이 지분 가진 업체서 관리>
<[단독] 홍만표, 50억대 상가도 보유…내일 검찰 소환>
이 취재원의 제보로 홍 변호사가 숨겨둔 자금으로 투자한 부동산을 밝혀냈다. 취재원에게 제보를 한 이유, 즉 L선배가 말한 ‘말하고 싶은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봤다.
"홍 변호사와 아내가 저를 인격적으로 무시했습니다."
L선배가 말한 '누구나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건 이런 거였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많은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는 가까운 사람의 진술에서 나왔다. 10명 중에 7~8명은 취재를 거부한다. 그런데 나머지 2~3명은 입을 연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욕망은 제각각이다. 개인적인 원한, 양심에 찔려서, 공명심 때문에, 폭로에 희열을 느껴서 등등.
취재원이 기자에게 입을 열 때 나타나는 흥미로운 모습 중 하나는 취재원이 정보의 비대칭에서 오는 권력을 즐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밤에 클럽에 몰래 다녀온 남자 친구에게, 이를 다 알고 있는 여자 친구가 씩 웃으며 "어젯밤에 뭐했어?"라고 물어볼 때와 같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우월하게 행동할 수 있고, 더 적게 아는 쪽은 불안에 떤다. 정보가 주는 권력 차이다.
취재원도 기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때 우월감을 느낀다. 기자의 관심이 시들해지면 정보를 하나씩 흘리면서 그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이는 원초적인 본능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취재원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생각해선 이해가 안 되는 이유들로 취재원이 말을 하기 때문에 기자에게 우월한 전략은 단 하나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질문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책 <기레기를 피하는 53가지 방법>에 담긴 글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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