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센 언니(여자)가 되고 싶었다. 육체적 힘이 세든, 정신력이 세든, 말발이 세든, 하여튼 세고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옷이나 장신구 등의 힘을 빌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라도 세 보이고 싶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어릴 때 삐쩍 마르고 약했던 탓에 누구와의 팔씨름에서도 이겨본 적이 없었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둥글둥글하게 살아서는 이 험한 세상 손해 볼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을 때부터였을까.
어른이 된 후, 센 언니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이상한 방식으로 구현되었는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학교 후배나 후배 사원들이 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선배라는 이유로 술자리에서 "첫 잔은 원샷!"을 외치며 술 마시기를 강요했다든지, MT를 가면 밤에 후배들을 '집합' 시켜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하필 나의 외모가 앳되게 생기고 동그스름해서 어떤 후배도 무서워하지는 않는 대신 "예예, 선배 대우는 해드립죠"라는 태도였지만. 겉멋에 찌들어 똥폼만 잡는 사람이 나였다. (몇 년 전부터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 거기... 손에 든 돌 내려놓으시길.)
토론 프로그램이나 예능에 나와 독설을 날리는 사람들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말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내뱉을 수 있는 용기에 감탄하곤 했다. 왜? 나는 못했으니까. 친동생 말고는 소리 높여 누구와 싸워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속에 있는 말을 하다 보면 상대가 상처받지는 않을까 혹은 나를 다시 공격하지 않을까 싶어 입속에 맴돌던 언어를 꿀꺽 삼키곤 했다. 말을 하다 보면 이내 꼬여 버려하고 싶었던 말 중 반의 반도 못하는 상황이 잦기도 했다.
그래도 대학 때 학생회 선배들에게 "사회의 부조리함에는 침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워 표현하며 살려 노력했다. 세 번째 회사에서는 기업의 복리후생이 좋지 않다는 글을 사원 게시판에 버젓이 올렸다가 사장님에게 불려 가 된통 깨지고 글을 삭제당하는 일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더 세련되게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20대 중반엔 몰랐다. 그 후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센 언니의 모습은 점점 '할 말은 하고 산다'로 바뀌어 갔다.
근데 이것 또한 이상한 방식으로 발전했다. 친해지기 전에는 예의를 차리다가 가까워지면 장난스러운 발언을 잘하는 편인데 가끔은 수위가 높아서 뱉어놓고도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센 언니가 아니라 재수 없는 혹은 실없는 언니에 가깝다.
결국, 마흔 중반의 나는 여태 센 언니가 되지 못했다. 본질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페토라는 앱에서 아바타를 만들 때조차 "어차피 만드는 아바타 세상 가장 센 언니로 만들 테야" 하고 결심했지만 이것저것 조합한 결과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을 뿐 순하고 귀여운 아바타가 탄생했다. 그에 비해 원래 내강외강인 지인의 아바타는 엄청 세 보였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약 3년 전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듣는 순간, 내가 해야 할 건 저것이라는 직감을 했다. 한 개인으로서 당당히 브랜드가 되고 싶은 마음! 하지만 그 당시 현실 속의 나는 애 키우고 닥치는 집안일을 해치우기에도 벅차서 '브랜딩 같은 소리'를 붙잡고 늘어질 여력이 없었다.
요즘에서야 조금씩 다시 한번 해볼까 싶어 나를 면밀히 관찰하는 중이다. 내가 가진 많은 강점과 특징 중에 무엇을 내세워야 할 것인가. 무엇을 브랜드화하여 널리 알려야 할 것인가. 관련 책 6-7권을 독파하며 배운 내용을 토대로 MBTI도 유료로 다시 해보고 (결과: ENFP) 분석하며 나를 지칭하는 단어들을 종이에 나열해 보았다. 명사와 형용사가 쫙 깔렸는데 역시나 그중에서 센, 강한, 카리스마, 리더십 이런 것을 연상시키는 것은 없었다. 대신 웃기고 재밌고 엉뚱하고 발랄한 성격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유머가 넘치셨어요?"
"첫인상은 새침한데 입을 열면 골 때려."
"우리 이 씨 집안에 특이한 며느리 들어왔네!"
이제 나는 센 언니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내려놓는다. 몇십 년 가보겠다고 노력했지만 내게는 허락되지 않던 길. 센 언니보다 더 강해지기로 했다. 웃기고 재밌는 언니로 거듭나겠다. 퍼스널 브랜딩의 방향을 이 쪽으로 잡았다는 이야기를 이렇게나 구구절절하고 앉았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