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세상을 떠나던 날 라면을 끓였다
오후 한 시 반.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으슬으슬 몸이 춥다. 아무리 스코틀랜드라지만 5월에 한기가 느껴지다니. 뭐라도 좀 먹어야겠는데 먹고 싶은 게 없다. 음식을 할 여력은 더더욱 없다. 찬장을 뒤지다가 태국 라면을 발견한다. 지난 2월에 가족들과 놀러 갔다가 현지 마트에서 산 거였는데 하나가 남은 걸 기억해낸다.
없는 힘을 쥐어짜서 냄비에 물을 붓는다. 전기 레인지는 더디게 물이 끓어오른다. 그래도 열이 들어가고 시간이 흐르자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온다. 수증기가 부엌을 가득 메운다. 면과 수프를 물에 집어넣는다. 태국 라면 특유의 매콤함이 콧 속으로 들어와 재채기를 하다가 남편은 지금쯤 어디를 날고 있을까 생각한다. 아직은 유럽 하늘 위에 있겠지.
전날 아침, 나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예매를 했다. 급히 가느라 코로나 PCR 검사는 공항에 있는 곳에서 했는데 출발 2시간 전에 양성이 나왔다. 지난 4월 아버지를 보러 한국에 열흘 다녀왔을 때 코로나에 걸린 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었다.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먼 길을 떠나셨다고. 장례 준비를 시작한 엄마의 목소리가 분주하게 들렸다.
남편이 나 대신 가기로 했다. 새벽에 그를 공항에 데려다주고 PCR 검사가 음성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끊었다. 딸은 못 가지만 아버지가 예뻐하던 사위가 갈 테니 너무 속상해 마셔요, 하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라면을 사발에 부어 식탁에 가져왔는데 갑자기 식욕이 돌기 시작한다. 어이가 없다. 나를 낳아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집에 덩그마니 남은 상황. 슬픔에 퐁당 빠져 허우적대도 시원찮을 판에 왜 배는 고프고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지, 내가 사람이 아니라 동물처럼 느껴진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라는 관용어구가 역겹게 느껴진다. 이럴 땐 배가 안 고팠으면 좋으련만.
젓가락을 들어 면을 건져 입에 넣는다. 황당하게 맛있다. 따뜻한 국물이 으스스했던 몸을 데워준다. 내 몸이 그랬던 건 기온 때문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마음에 불어온 찬 바람 때문이었으리라.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다. 힘이 난다. 눈물도 함께 난다. 라면 먹고 흘리는 눈물에는 MSG가 들어있을까? 그 힘으로 나는 정신을 차린다.
식욕. 살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2년 여전 폐섬유화를 진단받았던 우리 아버지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식욕을 잃으셨다.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국 물 한 모금도 못 드시는 상태가 되었을 때 응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셨단다. 수액을 맞는 대신 코로 연결하는 관급식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6일째 되는 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
4월 어느 날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중국 작가인 위화의 <인생>이라는 책을 읽었다. 국공내전, 문화혁명 시대 '푸구이'라는 한 인물의 과거를 따라가며 중국의 현대사와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던 소설이었지만 내 기억에 가장 또렷이 남는 부분은 이 구절이었다.
"사람이 뭔가를 먹고 싶어 하면, 이제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거라네."
푸구이의 아내 자전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식욕이 돌아와 죽을 끓여달라는 장면에서 푸구이가 한 말이다. 나의 아버지는 식욕이 돌아오지 못해 먼 길을 떠났는데 자전은 죽을 먹고 살아났다. 우리 아빠도 뭔가를 먹고 싶어 했다면 하루라도 더 사셨을 텐데. 그랬다면 내가 한국에 다시 갈 때까지 기다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 먹어야 살지. 나라도 먹어야지. 이 구절을 떠올리며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라는 말의 역겨움을 거둬들였다.
때와 상황을 가리지 않고 기지개를 켜는 식욕을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씩씩하게 먹을 것이다. 음식을 먹고 힘을 내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행복하려 노력할 것이다. 눈물이 나면 흘릴 것이다. 마음이 헛헛해지면 또, 라면을 끓여 먹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