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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Sep 14. 2022

한국 뜨며 책 100권 들고
갔더니 생긴 일

미국 갈 때 책 100권을 들고 갔다. 14년 전 일이다. 남편 유학 길에 따라나선 거였으니 졸지에 경력 끊고 유학생 와이프가 되는 순간이었다. 첫 딸 나이는 2살. 낯선 땅에서 주부를 전업 삼아 애 키우며 읽느라 100권을 전부 읽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는 헤아릴 수 없다. 한국 다녀올 때마다 5권씩, 10권씩 새 책을 사 왔고 미국에서 직배송으로 받기도 했기 때문에 더욱 헷갈린다. 여태 첫 장도 펴지 않고 책장에서 먼지 받이가 된 책들이 있다는 것만 확실할 뿐.  


그때의 심정은 "지푸라기 잡기" 플러스 "궁금함"이었다. 일도 그만둔 마당에 뭐라도 하기 위해 고른 게 책이었다. 모두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일까,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다. 사회생활할 때 기사나 보도자료를 쓰는 일을 했으면서도 책은 거의 읽지 않는 사람이 나였다. 대학교 때 선배들과 읽은 사회과학 서적, 유명 작가의 소설이 전부였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게 좋은 책인지 모른다.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100권을 들고 가리라 마음먹긴 했는데 뭘 사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책벌레 문학소녀 친구와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들었던 글쓰기 수업 강사의 도움의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분야를 가리지 말고 읽어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직접 뽑은 양서의 목록을 길게 늘어뜨려 주었다. 


온라인 서점에서 한 권 한 권 찾아가며 소개글을 살피며 읽어낼 수 있는 책인지 검토한 후 주문했다. 헌책방 사냥도 자주 했다. 세계명작, 소설, 역사, 심리, 사회과학, 경제. 경영, 자기계발, 만화 등 다양하게 모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1. 나의 세계가 넓어지다


책을 안 읽던 사람이 100권의 책을 쌓아뒀다고 갑자기 독서형 인간으로 거듭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걸 사는데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 읽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한 권에 만 원씩만 잡아도 백만 원어치 아닌가. 투자비용을 생각하며 책을 손에 집어 들었다. 그러자 서서히 나의 세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분야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만의 독특한 아파트 문화를 소개하는 <아파트 공화국>, 무얼 먹느냐로 세상을 바꾼다는 <음식혁명>, 설탕이 약으로 쓰일 때가 있었다는 <설탕의 세계사>,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삶을 다룬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 전에는 몰랐던 세상의 이야기가 나의 뇌를 흔들어 깨우고 마음을 적셨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로 꼽는 <인간 없는 세상>은 미국의 한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이 썼는데, 세상에 인간이 없어진다면 100년, 1000년을 넘어 몇 억년 후 지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상상하여 쓴 책이다. 상상은 철저한 취재에 따른 논리를 담았다. 미래를 말하지만 읽고 나면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며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고민할 거리를 담뿍 안겨주는 책이다. 


만담꾼 성석제의 <조동관 약전>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강렬했던 <눈먼 자들의 도시> 같은 소설도 예전에는 읽어보지 못한 유형이었다. <유혹하는 글쓰기>,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같은 글쓰기 분야의 바이블 같은 책들도 이때 읽었다. 그동안 내가 직장인으로서 썼던 글의 깊이가 얼마나 얕았는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간접경험으로의 독서, 그것은 그동안 몰라서 보지 못했던 곳으로 시선을 확장시켜 주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을 나온 것이다. 

 


2. 닮고 싶은 문장을 만나다


훌륭한 내용을 담아 잘 쓰인 책을 많이 읽다 보니 "나도 저렇게 쓰고 싶다!"라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생각만 한다고 따라 할 수는 없다. 문장은 기술이나 기교가 아니라 오랜 세월 숙성되어 온 저자만의 통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닮고 싶은 문장이 가장 수두룩 했던 책은 신영복 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김애란 님의 <달려라 아비>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사색의 깊이에 감탄하며 한 줄 한 줄 되뇌며 읽었다. 사실 내가 따라 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었다. 그저 내용이 너무 좋아 여러 군데 옮겨 적으며 읽기만 반복했다. 그에 비해 <달려라 아비>는 어쩐지 조금만 노력하면 될 것도 같아 보였다. 물론 처음에만 그랬다. 여전히 김애란 님의 문장을 좋아하지만 이 또한 내가 다다를 수는 없다는 걸 안다. 시간이 흐르고 계속 책을 읽자 점점 나만의 개성이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졌다. 모방하려다 창조를 꿈꾸게 되었다. 



3. 서평으로 돈을 벌다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글 쓰기는 즐겼던 터라 블로그에 읽은 책의 내용을 요약하며 감상을 적었다. 그게 쌓이자 어느 날 네이버 <오늘의 책>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없어진 코너다.) 내가 쓴 서평을 거기에 싣겠다는 것이다. 인터넷 서점에서도 수 차례 연락이 와서 서평을 가져갔다. 그러면서 3만 원, 5만 원씩 현금을 받거나 문화상품권을 얻었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내 글이 뽑혔다는 사실과 책을 읽어낸 나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녹록지 않은 유학생 와이프 시절의 큰 기쁨이었다. 그때만큼은 온전히 내가 된 기분이었다. 



4. 책 읽는 습관을 내 것으로 만들다


책이 책을 부른다. 한 권을 읽으면 거기에서 튀어나오는 물음표가 많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면 또 다른 책을 집어 들게 된다. 그게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어느 날 책 읽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매일 읽지 않아도 머릿속으로는 항상 다음번에 읽어야 할 책을 고르고 있다.  


그래서 인생에 한 번쯤은 <책 100권 쌓아 놓고 읽기 프로젝트> 같은 걸 해봐도 좋겠다고 추천하고 싶다. 일단 지르면 나처럼 돈이 아까워서라도 읽을 확률이 커지고, 옆에 두면 눈에 보일 터. 그러다 보면 오다가다 넘겨보다 읽어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시작이 어렵지, 일단 독서의 재미에 발을 붙이고 나면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 책이 책을 부른다. 



5. 14년 전보다 나은 사람이 되다


14년 전의 나는 자기가 제일 잘 난 줄 알고 까불었다. 큰 목소리와 활달한 성격을 무기 삼아 모르는 것도 아는 체하며 (그때는 정말 안다고 착각했다) 목을 빳빳이 들고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한 뒤로 우주 같은 세상 앞에 나는 그저 먼지 같은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독서는 아직도 모르는 게 많고 부지런히 읽어야 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 자만한 마음에 겸손을 심어주었다. 


그걸 깨닫고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그 시절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이유다. 여전히 깨야 할 편견 속에 갇혀 살지만 깨닫는 즉시 받아들이려 노력하다 보면 내일은 더 괜찮은 사람이 될 거라 믿는다. 


이제 나는 문제가 생기면 책부터 찾는다. 독서클럽을 운영하며 멤버들이 선정한 책을 읽고 격주로 토론을 한다. 가끔은 책 읽느라 밤을 세기도 한다. 무엇보다 다양한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걸 바탕으로 나의 생각과 경험을 합쳐 골고루 반죽하며 나만의 인생 레시피를 써내려 가고 있으니, 좀 멋지지 않은가. 한국 뜨며 책 100권 들고 갔더니 생긴 일이다. 




글 쓰기로 우주 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독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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