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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Apr 28. 2023

냉장고 없이 2주 반을 살았다

냉장고 크기만큼의 욕망에 관하여

냉장고 없이 2주 반을 살았다. 경우가 좀 특별했다. 남편이 한국으로 직장을 옮겨 간지 한 달밖에 안되었을 때 영국 사는 내가 두 딸을 데리고 그 집으로 들이닥쳤으니. 가구며 가전이며 세팅이 안된 상태였다. 그가 사는 집에는 이중으로 된 창문 틈(안창과 겉창 사이로)으로 폭 20cm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급한 데로 여기에 놓으면 돼."


남편은 사들고 온 과일을 그곳에 놓으며 해맑게 웃었다. 일교차가 큰 한국의 4월, 창틈은 밤사이 훌륭한 냉장고 역할을 해주었다. 매일 아침마다 집을 나서기 전 모든 음식을 먹어 없앴다. 


결혼 당시 혼수를 장만할 때 사람들은 말했다.  


"냉장고는 무조건 큰 것으로!"


결혼을 먼저 한 선배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하지 않은 친구들조차 어디선가 이런 말을 주워듣고 와서는 확신에 차서 조언했다. 그래야 밑반찬도 보관하고 냉동식품을 많이 쟁여둘 수 있겠지. 김치냉장고를 별도로 구매하지 않는다면 각종 김치도 보관해야 하니 크면 클수록 좋다는 건 진리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 말을 믿었다. 10평 남짓한 봉천동 신혼집에 800L가 넘는 양문형 냉장고를 욱여넣었다. 


하지만 갓 결혼한 20대의 젊은 남녀는 집밥보다는 사회밥을 더 많이 먹었다. 밑반찬을 만들 시간도, 살 시간도 부족했다. 냉장고는 휑했지만 거의 열지를 않아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잘 몰랐다. 단단한 당근도 냉장고 안에서 한 달 넘게 있으면 무르고 썩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거실 겸 부엌이던 공간에 그렇게 큰 냉장고가 차지하니 집은 더 좁아 보였다. 


냉장고 크기는 욕망의 크기에 비례했다. 그 안에 각종 반찬이나 맛있는 음식을 넣어두고 살고 싶다는 욕망, 김장김치 같은 걸 갖다 줄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는 욕망 - 그래서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를 느끼고 싶은 욕망, 더 나아가 지금은 비록 10평 집에 살지만 언젠가는 크기에 걸맞은 넓은 집을 갖고 싶다는 욕망 같은 것. 


어느 욕망 하나 이루지 못하고 한국을 떠나면서 냉장고를 처분했다. 미국, 영국에서의 냉장고는 훨씬 작았다. 그래도 살 수 있었다. 아쉬우면 아쉬운 데로 냉장고 크기에 맞춰 음식을 사들이고 요리하며 결혼생활 20년을 꾸려 왔다. 


2023년 한국의 봄. 2주 반을 냉장고 없이 살아 보니 그것도 할만했다. 반드시 차게 먹어야 하는 맥주, 막걸리 같은 술도 적당량만 사온 뒤 한두 시간 안에 마시면 되고 떡이나 빵 같은 것도 먹을 만큼만. 자연스럽게 1+1 행사 같은 건 멀리하면서. 창문 틈 사이 외풍이 만들어주는 냉기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소량씩. 그러면 냉장고 없이도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갖고 싶다, 되고 싶다는 욕심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부리면 행복할 텐데. 





글쓰기로 우주 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글쓰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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