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주만에 집에 들어왔다. 가이드에게 집은 또 하나의 호텔이다. 맞춤 세탁 서비스가 제공되는 공간. 그뿐인가. 압력솥에서 갓 지은 따순 밥도 속이 다 풀릴 뜨끈한 국도 내준다. 하룻밤 잠깐 눈만 붙이고 다시 새로운 짐을 꾸려 나가려는 사이 집안 냉장고를 응시한다. 그간 아이들에겐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우리 집 냉장고는 대자보이자 게시판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종이에 써서 자석으로 붙인다. 남들은 여행 나가면 저마다 냉장고에 붙일 예쁜 자석을 모으는데, 우리 집은 여행지의 자석이 들어갈 틈이 없다. 가끔 아이들의 숙제로 가족사진을 인화할 때면, 내친김에 몇 장 더 뽑아서 추억 삼아 냉장고에 붙여둔다. 한 장의 사진 속에 이야기가 들어있고, 여행지에서 일어난 온갖 에피소드가 모여있다.
학기가 시작할 때면 아이들이 언제 교복을 입고, 체육복을 입는지 알려주는 쪽지가 붙는다. 실은 쪽지를 붙여 놓는다 해도 엄마와 아빠는 매번 아이들에게 묻고 또 묻는다: 내일은 체육복이니, 교복이니. 또 체육복이니? 그럼 얼른 옷 벗어야지. 그래야 세탁기에 넣어서 돌리고 말리지. 언능 벗어라. 아직도 안 벗었니?... 냉장고가 사람이라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같은 또는 비슷한 소리를 듣느라 두통을 달고 살지 않았을까? 그래서 가끔씩 그 증상으로 웅~~ 웅~~~ 거리는 소리를 내는 건 아닐지.
한편, 학기 중에는 아이들이 작성한 과제물로 가득하다. 자기 방 책상에서 정리해도 되겠건만,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업적을 알릴 기회로 냉장고를 애용한다.
사춘기인 첫째는 그나마 조용하다. 녀석의 관심은 냉장고 밖이 아닌 냉장고 안이다. 그야말로 돌아서면 배고프다며 시도 때도 없이 먹을 철인건지, 방금도 기다란 토마토 하나를 꺼내 흐르는 물에 씻어 한입 베어 먹는다. 나도 아들에게 오이 하나 깎아 달라 한다. 물에 씻는 소리를 어찌 들었는지 둘째도 와서 당근을 꺼낸다. 맞다, 우리 아이들은 생야채를 즐겨 먹는다. 여기까지 가면 막내라고 빠질 리가... 녀석은 사과 하나를 꺼내 접시에 담아 달라 한다. 냉장고는 안으로 밖으로 쉴 새가 없다.
피카소를 이어갈 작정인지, 하루에도 그림을 열댓 장씩 그리는 막내딸의 스케치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가 하면 이 달의 독서왕이라든지, 모범생 표창장도 종종 올라온다. 최근에는 수학 올림피아드에 출전한 둘째 녀석이 받은 상장까지. 며칠씩 밖에 나가 일한다는 핑계로 신경 하나 못 쓰는 상황에서 알아서 잘 커주는 아이들을 볼 때면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이다.
나도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하나 남겨놓고 가야겠다. '오늘도 화이팅!' 이라든지, 아이들 이름 하나하나를 써가며 곰살맞게 '사랑해~'라고 전하든지. 무어라도 하나 남겨놓고 가야 일주일 남짓 떨어져 있는 동안 가족에게 뭐라도 아빠라는 존재감을 심어줄 것만 같다.
냉장고의 얼굴은 가족 구성원의 소식과 알림으로 눈화장을 하고, 볼터치를 하며, 빨간 립스틱으로 포인트를 준다. 여행지의 마그네틱은 어딘가 깨지고 부서져서 제대로 모양새를 갖추지 못했지만, 알록달록 아이들이 커가는 생생한 소식지 덕에 회색빛 냉장고는 어떤 주방용품보다 생기를 갖춘다. 다음에 집에 오면 또 어떤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까? 설렘과 기대 속에 냉장고 게시판을 한번 더 보고 나갈 채비를 갖춘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서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냉장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