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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Jun 29. 2023

쟁여놓고 살다가 망했습니다

통밀가루 사망 사건

나에게 민원이 접수되었다. 자기들이 사는 주방 수납장에 이상한 냄새가 진동을 하니 얼른 확인하여 치워 달라는 내용이었다. 여럿의 서명이 든 종이도 함께였다. 아마 <오뚜기 카레 매운맛>이 주도했을 것이다. 걔는 성격이 늘 불 같다. 하지만 나는 바빴다. 미니멀리즘에 빠져 장난감 팔겠다고 레고를 조립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델별로 만들어봐야 어떤 조각이 있고 없는지 알게 아닌가? 그랬더니 이번엔 투쟁가다. 


 ♫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 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


알았어, 알았다고! 안 그래도 다음 주에 조사하려고 했다고! 하는 수 없이 일정을 앞당겨 2층으로 된 싱크대 하부장에 있는 식재료를 모두 꺼내 4인용 식탁에 모았다. 금세 자리가 차는 바람에 위로 위로 쌓아 올렸다. 그러면 그럴수록 두 눈은 커지고 입에선 바람이 셌다. 저 좁은 공간에 이 많은 것이 숨어 있었던 거 실화냐? 우리 집 싱크대는 화수분이 분명하다.   


뭐 이래 많노


갑자기 빛을 본 소스류며 면류들이 나오다가 한 마디씩 투덜댔다. 해찬들 된장이 나를 누르고 있어서 숨도 못 쉬고 살았단 말이다, 땅콩버터는 얼마 전에 사놓고 왜 또 새 걸 사서 들여보낸 거냐, 집이 너무 좁다, 우리도 넓은 팬트리로 이사 가고 싶다, 재잘재잘 참새처럼 쫑알대다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맨 안쪽에 있던 통밀가루가 변사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밀가루 포장지 표면이 온통 초록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양손으로 잡고 꺼내는 바람에 아마 곰팡이 포자가 몇 만 개는 떨어져 나왔을 것이다. 안을 열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 상태였던 걸까.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거였는데. 어딜 잡고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지 난감했다. 손이 초록색이 되었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식료품들은 자신들의 앞날도 그렇게 될까 봐 충격에 떨며 말이 없어졌다. 주방 공기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하나하나 유통기한과 사용기한을 확인했다. 마침내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우리 곁을 떠날 친구들이 있다. 꿀, 코코아 가루, 그레이비 가루 그리고 밀가루 3종 다 나와."


호명된 재료들은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며 풀이 죽은 채 앞으로 나왔고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은 쓸쓸하게 가는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잘 가. 다음 생이 있다면 좋은 주인 만나 사용 기간 전에 다 쓰여서 명예롭게 떠나길.  


"미역이랑 다시마, 너희는 유통기한이 3년이 넘었지만 후쿠시마 오염수 때문에 앞으로 구하기 힘들 수 있으니 이번엔 살려둘게. 일본 카레 약간 매운맛, 너는 몇 개월이 지나긴 했구나. 이번주 내로 카레라이스로 변해보자."


그때 샘표 소면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처음부터 조금씩 샀으면 되는 거 아니야? 사다가 버리는 게 취미인 줄은 몰랐네. 하루아침에 친구를 잃은 우리의 기분은 생각해 봤어? 생각해 봤냐고!"


맞는 말이다.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거슬렸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미안하다고만 했다. 지금부터 열심히 찌개와 국을 해 먹는다 해도 올해 안에 도저히 사용할 자신이 없는 국물용 멸치 알약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는데. 삼계탕용 약재 티백도 8개나 나왔다. 서너 달에 한 번씩 삼계탕을 하니까 대충 2년 치다. 우리 집 식구는 유통 기한이 훨씬 지나서까지 먹게 되겠지. 한참 지난 약재를 넣어 닭을 끓이면 그걸 건강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어릴 적 나와 동생은 용돈으로 과자를 사 오면 그 즉시 먹어치웠다. 끼니때마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 외에는 간식거리가 쌓여 있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지현이네 놀러 갔는데 신세계를 접하고 말았다. 철제 바구니로 된 수납함 두 곳에 갖가지 과자가 수북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지현이와 나는 먹고 싶은 걸 골라 방에 가져가 먹은 뒤 또 갖다 먹었다. 걔네 엄마는 약사였고 아빠는 방송국 PD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무엇이든 넉넉히 쌓아 놓고 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모자란 것보다는 차고 넘치는 삶을 꿈꾸었다. 한창 음식 만들고 있는데 재료 하나가 똑 떨어지면 곤란하니까, 케첩이나 마요네즈, 참기름 같은 것도 마트에서 눈에 보일 때마다 사서 두세 개씩 쟁여놔야 안심이 되었다. 대형마트에서 하는 묶음판매의 기회를 만날 때마다 도마뱀 파리 잡듯 그 즉시 낚아챘다. 


하지만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쟁이고 살았다. 좁은 수납장을 꽉꽉 채우면 필요한 걸 꺼낼 때마다 물건들과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다. 다들 숨는 데 도가 터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또 샀다. 뭐에 걸렸는지 서랍이 안 열릴 때도 많았다. 기분 좋은 날엔 네 손가락 조심히 넣어 꾹꾹 눌러가며 해결을 하지만 어떤 날은 어떻게 해도 안 돼서 미치도록 화가 났다. 잘 열리지 않는 서랍이 꼭 내 인생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소금 4종 / 호떡 믹스류 / 육수용 알약


이번엔 버렸다. 날짜가 지나서 버렸다. 변해서 버렸다. 필요하지 않아서 버렸다. 쌓아 놓고 사는 게 행복이라 착각했던 나의 생각도 함께 버려 버렸다. 버리고 남은 걸 정리하여 하부장에 넣었다. 공간이 생겼다. 뭐가 어디에 있는지 한눈에 보였다. 주방에 바람이 불었다. 살랑살랑. 식재료들은 쾌적한 환경에서 다시 안정을 찾고 투쟁가 대신 트로트를 불렀다. 


 ♫ "찐찐찐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 ♪

 

여분의 물건을 쟁여두고 산다는 건 집의 일부를 저장 공간으로 쓰겠다는 뜻이었다. 여러 개를 사면 할인해 주는 것은 어쩌면 마트가 우리에게 저장 비용만큼 깎아줘서일지 모른다. 하나를 사는 대신 5개들이 묶음을 샀을 때 4개의 저장 공간을 마트에서 우리 집으로 옮겨준 대가로 말이다. 


앞으로는 마트나 시장에게 저장과 관리를 맡기려 한다. 당장 없어서 불편한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나보다는 그들이 유통기한이나 제품 관리를 잘해줄 것 같다. 조금씩 사느라 비싸게 지불하는 금액은 저장 비용, 관리 비용의 몫이라 생각하면 아깝지 않다. 사놓고 버리는 게 아까울 뿐. 이 자리를 빌려 우리 집 주방을 떠난 그들에게 머리 숙여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이다.   


삼가 고밀가루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꿀의 명복도 빕니다. 

삼가 고코코아의 명복도.

삼가 고그레이비도.

삼가자. 함부로 많이씩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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