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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May 15. 2023

이 많은 컵은 다 어디서 왔을까

하늘에서 떨어졌을 리는 없고

컵과의 한판 승부가 펼쳐졌다. 


싱크대 상부장 맨 왼쪽 찬장을 열어 선반 3칸을 가득 채운 컵을 모두 꺼냈다. 2겹, 3겹으로 위태롭게 쌓여 있는 그것들을 주르륵 늘어놓았더니 턱관절이 아래로 ‘툭’ 떨어지며 ‘헉’ 소리가 절로 났다. 벌어진 입 사이로 한숨만 오르락내리락. 우리 집에 이렇게 컵이 많았어? 기가 막혀서 하나, 둘, 셋, 넷… 세어 보다가 스물이 넘어가고부터는 21, 22, 23으로 바꿔 셌다. 


아직 뜯지 않은 와인잔 세트와 반대편 찬장에 숨어 있던 커피잔까지 포함시키니 숫자는 70을 넘기고 나서야 멈췄다. 머그잔 4개로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것 같은데 어쩌자고 컵이 70개로 불어났을까. 충격이었다. 너희들은 다 어디서 왔니?


이 사진에 포함되지 않은 컵도 있다니


살펴보니 기념품이라 공짜로 받은 것도 있고 아트 페스티벌에서 산 핸드메이드 작품도 있다. 주스를 담으면 예뻐 보일 것 같아  6개짜리 이케아 유리잔도 세트로 구매했다. 마트에 들렀다가 재질이 맘에 들어, 어떤 건 색깔이 취향저격이라 데려온 적도 있다. 미국 살 때 기저귀 포인트를 모았더니 무료로 만들어준 애들 사진 박힌 컵과도 오랜만에 재회했다.  


아이고, 술잔 쪽은 더 가관이다. 소주를 거의 마시지 않은 집에서 소주잔이 왜 10개가 넘는지 아직까지 미스터리다. 위스키 잔은 날씬한 것, 볼록한 것 등 3종류, 맥주 잔도 2종류. 컵 표면에 포도를 재배하고 으깨서 술 담그는 장면이 벽화처럼  새겨진 주석잔도 있다. 안 쓴 지 15년쯤 되었나.  



드디어 비밀이 벗겨졌다. 주방이 좁은 편도 아닌데 수납공간이 부족했던 비밀. 이게 다 컵 때문이었던 것이다! (추후 숟가락 때문이었음도 밝혀짐. 구석구석 살피니 밥숟가락만 25개.)  


 “얘들아, 원하는 컵 3개씩만 골라 봐.” 


두 딸들은 늘 쓰던 것을 골라냈다. 나 역시 그날 아침에 쓴 것들 위주로 빼놨다. 컵이 아무리 많아도  사용하는 건 따로 있다. 입술에 닿는 부분의 두께가 적당하다던지, 세척하기 편하다던지, 친구에게 받아 의미가 있다던지. 선택받은 컵들은 당당히 찬장으로 돌아갔다. 술잔 중 상당 수도 다시 갔다. (살아남은 숫자를 세어 보니  우리 집은 물보다 술이 중한 듯) 




막상 단출하게 놓인 컵들을 보자 이 정도만 있어도 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바로 전날 저녁 개수대 옆에 놓인 컵 12개를 한꺼번에 씻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설거지는 쌓아놓고 해야 제맛인데. 이제부터는 바로바로 하지 않으면 깨끗한 컵이 없어 물도 못 마실 것이다. 할 수 있을까? 


선택의 시간이다. 컵의 숫자를 줄여 깔끔해진 부엌에서 자주 설거지를 할 것인가, 먹을 때마다 빽빽하게 쌓인 컵을 꺼내 사용하고 한쪽에 지저분하게 늘어놓았다가 가끔 설거지를 할 것인가.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앞으로는 자주 닦을 수밖에 없다. 


걱정과는 달리 며칠이 지났는데도 큰 어려움이 없다. 한 사람 당 3개씩도 충분했다는 이야기다. 그저 사 모았기에 보관했고, 정리할 시간도 부족했고, 본전 따지면 아까우니 버리기가 힘들었고, 분류하여 내다 버릴 생각 하니 머리도 아프고. 이런저런 이유로 좁은 부엌을 감내하고 살았던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많은 컵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버리기는 정말 힘들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막상 따로 빼놓은 컵들을 보니 크고 작은 사연들이 묻어있어 선뜻 정리가 안되었다. 게다가 그놈의 "나중에 필요할 것 같아서"가 발목을 잡으니 원. 언젠가 손님이 오면 다 쓰게 될 것 같고, 언젠가 지금 쓰는 컵이 깨지면 대신해야 할 것 같고, 언젠가 마음이 바뀌어 딱 그 컵을 쓰고 싶어질 것 같고. 


이쯤에서 깨닫는다. 미니멀리스트가 되려면 구매 시점부터 똑똑하게 사야 한다는 것을. 사지 않으면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비우는 과정도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이 든다는 것을 말이다. 


기분에 따라 쓰고 싶은 컵이 다르지 않겠어? 이렇게 생각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집어 들었던 나의 소비 습관을 반성했다. 더 이상 그릇과 컵들에게 나의 부엌을 함부로 내어주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다. 앞으로 더 부지런해질 테다.



* 덧붙임: 컵을 정리하다 정말 궁금해졌다. 여러분들의 집에는 컵이 몇 개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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