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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Mar 07. 2023

뱀 나오는 방에서 미니멀리즘?

나는 뱀띠다. 우리 집엔 뱀이 산다. 두 문장 사이에 연관성은 없다.  


네댓 마리는 사는 것 같다. 다행히 모습을 드러내진 않는다. 대신 허물을 남긴다. 둘째 딸 방에만 남긴다. 허물이 점점 커지는 걸 보니 뱀도 잘 크고 있는 듯하다. 딸은 토끼띠다. 토끼가 뱀 허물을 벗을 수도 있다는 걸 몇 년 전에 알았다. 허물은 가끔 빨래통 안으로 들어간다. 깨끗해졌다가 토끼를 입히고 다시 뱀 허물이 되어 방바닥에 나타난다. 둘째 딸 방에서만 나타난다. 


"엄마, 내 방을 에스테틱하게 꾸미고 싶어."


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 때 나는 바로 맞받아쳤다. 일단 치워. 입었던 옷만 제자리에 정리해 놔도 에스테틱해질 걸? 딸이 말했다. 근데 내 방에 물건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나도 말했다. 그러니까 엄마랑 이참에 미니멀리즘을 하는 거야! 


틱톡에 빠져사는 딸은 인터넷 세상에 떠도는 깔끔하고 예쁜 방을 탐냈다. 아마존에서 엽서 크기의 그림을 사서 벽에 붙여 놓기도 하고, 침대 테두리에 조명을 둘러 밤마다 켜 놓고 분위기를 즐겼다. 여기까지는 오케이. 근데 어질러 놓은 방을 치우질 않는다. 바닥에 발 디딜 틈이 없다는 표현을 몸소 보여준다. 그래 놓고 에스테틱이 어쩌고? 미학적이라는 뜻이라고 네이버 사전이 알려준다. 아름답게 꾸미겠다, 이거지. 


사진으로 찍히지 않은 부분에  뱀 다섯 마리가 허물을 벗은 증거물이 남아 있었다. 차마 보여드릴 수가 없었다. 책상 앞엔 의자가 없고 의자 위엔 옷과 인형이 잔뜩 쌓였다.


지금 보니 그림에도 뱀이 있네


저 장식품들 모두 내가 사서 준 거라 할 말이...


미니멀리즘을 해 보자는 말에 딸은 못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본인의 성향을 잘 아는 듯하다. 그 부분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만 해보지도 않고 그런 말부터 하는 건 옳은 태도가 아니라고, 여러 자기 계발서가 가르쳐 주셨다. 계속 같이 하자고 꼬드기는 중이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아이 있는 집에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게 가능할까?




물건이 잔뜩 펼쳐진 곳에서 아이의 창의성이 자란다는 믿음이 있었다. 가수 이적의 어머니 박혜란 님의 이야기가 그걸 부추겼다. 아이를 키우면서 어질러진 집은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는 말. 아들 셋을 모두 서울대에 보냈다는 부분에서 "정리하지 않고 놔두기"는 근거로서의 신빙성을 획득했다. 모든 엄마들의 로망일 지도 모른다. 집정리를 하지 않아도 아이가 잘 자란다고? 대한 주부 만세를 외치고 싶었다. 


작은데 지저분하기까지 한 우리 집을 더 이상 보고 둘 수만은 없어 (미니멀 라이프를 외치며) 정리를 시작했지만 어느 정도는 아이에게 자극이 될만한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거실에 소파 하나 달랑 있는 집보다는 고장 난 로봇 청소기 같은 것도 버리지 않고 갖고 있다가 나중에 드라이버 들고 뜯어보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우리 집 애들은 뜯어가며 속을 살피던데. 그럼 다 갖고 있어? 그래도 버려? 미니멀리즘을 향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미친년 널뛰듯 춤을 춘다. 


하지만 질문으로 돌아가 대답을 해보자면, 아이가 있는 집에서도 미니멀리즘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깔끔한 집이 미니멀리즘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가족 구성원으로서 각자 가진 생각을 존중한다. 


다만 내가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며 가르쳐주고는 싶다. 1) 집안에 숨어 있는 쓰지 않을 물건을 재빨리 정리하면 집이 넓어져 쾌적해지고 2) 뭔가를 살 때는 진짜 필요한 건지 따지며 소비를 하면 좋겠다는 것. 3) 거실이나 주방은 가족 공용 공간이니 가급적 네 물건으로 어지럽히는 일은 삼가라고 말이다. 


요즘 자녀 경제교육이 유행이라는데 주식이니, 부동산 같은 건 가르칠 형편이 못되어도 미니멀 라이프 경제교육은 할 수 있겠다 싶다. 주어진 용돈 안에서 본인에게 가장 가치 있는 소비를 할 줄 알았으면 좋겠고, 갖고 싶은 걸 다 갖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음을 배운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대신 뱀 나오는 딸의 방은 해방구로 삼기로 했다. 집에서 한 곳 정도는 엉망일 수도 있지. 30여 년 전의 내 방도 딱 그랬는데 뭐.      


그래도 왔다 갔다 하며 지 에미에게 주워들은 말 덕분인지 둘째 따님은 미니멀리즘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을 키워가는 것 같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고 하니 하마터면 나의 미니멀 라이프가 도루묵 될 뻔한 것을 딸이 막았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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