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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Feb 27. 2023

버리기 시작했는데 집이 더 지저분해졌다

미니멀리즘의 명현 반응기

산수를 해보자. 1 빼기 1은 0이다. 2 빼기 1은 1이다. 빼면 줄어야 한다.  


그러니까 버리기 시작했으면 버린 만큼 집이 깨끗해져야 함이 옳다. 미니멀 라이프를 선언하고 몇 보따리를 버렸다. 그보다 더 많은 짐들을 차에 실어 채리티숍에 기부했다. 그런데 왜 버리기 전보다, 다시 말해 집정리 한답시고 일을 벌이기 전보다 더욱 산만해진 집을 마주해야 한단 말인가. 이 미스터리함을 두고 나는 단어 하나를 생각해 냈다. 바로 "명현 반응". 


한의원 홍보팀에서 일할 때 자주 썼던 말이다. 한약이든 침이든 치료를 시작하면 일시적으로 증상이 악화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명현 반응이라 불렀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 <허준>에서도 종종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문제가 있다면, 나는 일반인이므로 그게 좋아지기 위한 전 단계인 것인지, 약을 잘 못 써서 그런 건지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 봐야 안다. 치료가 되면 명현 반응. 안 되면 그냥 잘못된 만남. 


우리 집의 명현 반응 역시 시간이 지나 봐야 안다. 미니멀리즘을 향하는 길에 잠시 나타나는 지저분함인지, 원래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관성의 법칙에 따른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모두 나 하기에 따라 달렸으니 이를 어째.




버리기를 시작하며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집청소를 한다고 했던 것은 사실은 눈 가리고 야옹, 아니 눈 가리고 아웅이었던 것이었다. 안 보이는 곳에 쑤셔 박았을 뿐이다. 열면 걷잡을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창고며, 옷장을 열어 그 안의 물건을 꺼내 펼쳐 놓자 빛을 본 짐들이 스스로 증식하여 몸집을 불리는 지, 상상했던 양보다 부피도 종류도 훨씬 커져 있었다. 치우는 속도는 꺼낼 때와 비교하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더뎌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한꺼번에 다 버리자"라고 마음을 먹었다면 쉬웠을 것이다. 쓰레기통으로 옮겨 나르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짐들 중 일부는 버리고, 일부는 팔고, 또 일부는 기증하고, 나머지는 다시 보관을 할 것이므로 과연 이것을 버려 말아, 팔아 말아, 다시 한번 기회를 줘 말아를 선택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와중에 밥 먹을 시간은 꼬박꼬박 다가왔다. 프리랜서라 집에서 일하지만 어쨌든 일도 해야 한다. 다 펼쳐는 놓았지만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자 집 한 구석에는 꺼내는 놨으되 아직 정리하지 못한 물건과 또 다른 구석에는 버리려고 쌓아둔 물건, 또 한쪽에는 팔려고 마음먹은 것들이 사이좋게 뒤엉켜 무질서를 창조해내고 있었다. 명현 반응이다! 


왜 다음날이 되면 전날의 기개는 사라지고 다른 일이 하고 싶은 걸까. 이 상태로 며칠이 흘렀다. 


뭔가 꽉 차 보이지요? 네네, 미니멀리즘으로 가다가 만난 명현 반응입니다. 


치우는 속도를 더디게 하는 데 일등공신은 "추억"이라는 요망한 것 때문이다. 잘못하면 10년, 20년, 30년 전 흔적을 더듬으며 아, 그땐 그랬지 생각하며 촉촉한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떠서 시간여행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날은 게임 끝이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할 때는 사진, 일기장, 편지, 음반 등은 제일 뒤로 빼는 게 상책이다. 


추억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어릴 때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나 일기장 같은 걸 모두 가지고 있다.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는데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나중에 실컷 먹고살려고 쪼잔한 추억까지 다 모아두었다. 그런데 나이 든다는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40대가 30대보다 2배는 더 바쁜데. 지금 상태로 봐서는 50대가 되어도 별반 다를 것 같지 않다. 


60대가 되면 좀 추억을 더듬을 시간이 생기려나? 70 이상? 그렇다면 그때를 위해 이 많은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쟁이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고민이다. 미니멀리스트라고 무조건 추억을 정리하는 게 답은 아닐 텐데 어떻게 타협을 봐야 할지 생각 좀 더 해봐야겠다.   


자, 이제 이 글의 결론을 도출할 시간이다. 촘촘하게 짜인 시간 안에 미니멀리즘의 생활방식을 집어넣은 건 결국 나 자신이다. 세상에 공짜로 이룩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는 법이지. 물건 버리기, 집 정리를 시작했다면 이깟 명현 반응은 견디고 나아가야 할 일. 조급해하지 말 것, 포기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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