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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Aug 02. 2023

내가 죽으면 내 짐은
누가 정리해 줄까

복잡한 짐 정리가 유산이 되면 어떡해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유품을 직접 정리했다는 선배 언니를 알고 있다. 돌아가시기 전 두 분은 상가 건물을 지어 맨 꼭대기층에 사셨다고 한다. 아래층으로는 줄줄이 가게들이 들어섰고, 하나로 뻥 뚫린 지하 공간은 두 분이 사용하셨다.   


쌓아 놀 수 있는 공간이 넓은 게 시작이었을까. 그곳은 두 분의 창고가 되어 사용하지 않는 살림살이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결혼한 자식들이 해외로 유학 가기 전 사용하던 짐을 비롯하여 족보며 오래된 문서, 각종 수석, 골동품 같이 몇십 년씩 된 물건도 다 갖고 사셨다. "이걸 어떻게 정리하실 거냐?"고 그녀가 물어도 아버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큰 소리만 치셨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 앞날 아무도 모르는 일.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게 9년 전 일이다. 뇌사 상태에 빠져 있다가 먼 길을 떠나시는 바람에 남은 가족들이 애를 먹었다. 사람이 떠나면 장례만 치르면 되는 게 아니었다. 재산 상속뿐 아니라 아버지가 살아생전 활동하던 단체의 총무 같은 사람들이 받아야 할 돈이 있다며 찾아왔을 때 가족들은 통장 비밀번호조차 몰랐다고 했다. 사업을 하던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아 살림만 하신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류상의 문제를 겨우 겨우 해결하고 부모님 집에 갔을 때 선배는 너무 많은 물건이 지하에 쌓인 걸 보고 기겁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연로하신 어머니 혼자 상가 건물을 관리하는 것도 힘들 것 같고 그 많은 걸 쟁이고 사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이 참에 짐정리를 하고 작은 집으로 옮기자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두 팔 걷고 직접 물건 분류부터 시작했는데 중간에 포기했단다. 많아도 너무 많은 짐에 치여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사 갈 집에 필요한 것만 챙기시라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모든 게 필요하다고 해서 자주 목소리가 높아졌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업체를 불렀어. 덤프트럭이 오더라? 미리 지인들에게 필요한 거 다 가져가라고 했는데도 그 집 정리하는데 얼마가 들었는지 알아? 자그마치 900만 원이 넘었어."


두 분이 재미로 가꾸셨다는 텃밭도 정리하려니 모두 돈이 든다는 걸 그때 알았다. 


자료 이미지


그렇게 고향 한옥 집으로 내려가신 어머니. 그러나 곧 요양병원으로 옮기게 되셨고 작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다시 짐정리를 하려 내려간 집에서 선배는 또 한 번 놀랐다고 했다. 다 큰 자식들이 각자의 삶을 꾸려가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사이, 어머니는 새집에서 "잘 산 게 아니라 그저 살아내신 것 같다"고 했다. 


이사하면서 본인이 짐정리를 안 하다 보니 어디에 뭐가 있는지 하나도 모르셨던 모양이다. 못 찾으니 새로 샀다. 설탕 찾았는데 없으면 설탕 사고, 소금 찾았는데 없으면 소금 사는 식으로. 곳곳에 숨은 물건이 너무 많았다. 똑같은 것이 몇 개씩 나오는 걸 보며 그녀는 기가 막히기도,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옷을 좋아하셨던 어머니는 같은 디자인이라도 색깔별로 사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옷장을 열었을 땐 안쪽에서 가격표도 떼지 않은 똑같은 옷이 여러 벌 나오기도 했다.


"그때 결심했던 것 같아. 정말 나한테 필요한 거 하나씩만 갖고 살아야겠다고. 내 내이가 이제 쉰. 나도 30-40년이면 세상과 작별할 거잖아. 그때 남겨진 물건으로 인해 내가 이러저러한 사람이다, 그렇게 기억될 텐데 말이야. 우리 애들이 내 물건을 정리할 때 너무 수고스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특히 다른 사람 손에 맡기지 않아도 되게 정리하며 살다 가고 싶어."


보이고 싶은 모습만 남들에게 보여주며 살고 있듯, 떠난 후에도 보이고 싶은 모습만 남겼으면 좋겠다는 선배의 말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1년이 넘었다. 올봄 엄마네 갔더니 아버지가 쓰던 방이 그대로다. 옷은 대충 정리한 것 같은데 가구 배치나 그 밖의 짐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직도 배우자가 떠난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엄마이기에 유품을 몽땅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으셨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너무 많아서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은퇴 후 물건 사기가 취미였다고 했다. 대한민국 컴퓨터 1세대이자 엔지니어, 한때는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개발자셨던 아버지는 자유자재로 온라인 쇼핑을 즐기며 거의 매일 택배를 받으셨다고 한다. 


꼭 필요하다기보다는 있으면 좋을 것 같은 물건들. 예를 들면 물 나오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습기나 성능 좋은 제습기, 좌욕기나 발마사지기 같은 것. 그런 걸 사서 엄마에게 해보라고 권했는데 정작 엄마는 필요가 없었지만 아버지가 서운해할까 봐 쓰는 시늉을 하곤 했단다. 온라인 사용이 아버지보다 서툰 엄마는 물건을 중고로 팔 생각도 못하신다.  


내가 죽으면 누가 내 짐을 정리해 줄까?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길에서 종종 했던 생각이다. 선배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아버지를 보내며 이런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된다. 사고사나 병사 다양한 이유로 세상을 떠나겠지만 자연사를 했다 쳐보자. 평균으로 봤을 때 여성 수명이 남성보다 기니까 두 딸이 맡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삶으로 보아 애들에게 대단한 부를 물려줄 것 같지도 않은데 물건을 차고 넘치게 가지고 살다가 떠나는 바람에 복잡한 짐 정리를 유산으로 물려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내가 내 손으로 나의 물건을 정리하고 쓰지 않는 물건은 줄여나가는 게 답이다. 


특히 추억이 담겼다는 이유로 (자주 열어보지도 않을 거면서) 보관하는 물건들. 사람 얼굴이 있어 버리려고 해도 버리지 못한 사진만 몇 상자인데 애들이라고 버리기가 쉬울까. 어떻게 보면 내가 하기 힘든 일을 떠넘기는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요즘은 정리를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물건을 다른 이가 들춰봐도 괜찮은가? 그들이 버려도 상관없나? 내가 사라졌을 때 이 물건이 나로 기억돼도 좋은 건가? 그렇게 물으면 웬만한 것이 "아니다"로 나온다. 물론 아니라고 해도 정리가 쉽지만은 않다. 물건과 작별하는데도 적절한 인사를 나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가는 중이다. 


"언니, 그 많은 유품 중에 챙겨 온 건 없었어요? 엄마 생각날 때 볼 수 있게요."


선배에게 물었다. 


"있어. 엄마가 항상 하고 계시던 하얀색 옥목걸이. 그거 딱 하나."


목걸이 하나. 그것만 있어도 어머니를 떠올리고 추억하는데 충분하더라고 선배는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 시대 어르신들은 그렇게 사셨어도 우리는 달라져야 하지 않겠냐고, 누군가를 보내고 뒷정리를 해 보니 이제는 알겠다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모른다고, 수많은 물건에 치여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진짜 삶을 살아야겠다고 말이다. 


미니멀리스트를 꿈꾸길 잘한 것 같다.






* <내가 죽으면 누가 내 짐을 정리해 줄까?>라는 제목을 정하고 글을 기획하던 중 선배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연관이 있을 것 같아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했고요. 시간을 내어 당시의 상황과 심정을 말씀해 주신 선배님 J께 마음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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