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
혼밥과 혼술 같은 게 유행하기 전 혼자만의 여행을 실행한 적이 있다. 중차대한 변화가 눈앞에 서 있었(다고 생각했)고 어쩐지 고독을 좀 곁들여야 제대로 된 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 간담? 어딜 가야 혼자만의 고독을 질겅질겅 씹으며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있을까.
바다가 제격이지 싶었다. 수평선이 보이는 곳에 서면 머리도 맑아지고 좁았던 마음이 넓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하루. 강릉, 속초 이런 바다 대신 선택한 건 그래서 인천 앞바다였다.
때는 1997년 이맘때쯤이었고 나는 스무 살이었다. 대학 새내기 시절을 갓 지나 2학년이 되면서 활동하던 노래 동아리의 집행부가 되었는데 그러면서 생긴 고민을 해결한다는 게 바다를 선택한 이유였다.
동아리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이끌긴 뭘 어떻게 해. 그냥 하면 돼"라고 말하며 단칼에 접었을 문제이건만 20대의 나에게는 그게 되게 심각한 사안이었나 보다.
당시 동아리 선배들은 두 파가 있었다. 사람파, 음악파. 1) 노래 실력보다는 사람을 먼저 중요시해야 한다는 파와 2) 음악적 재능을 갈고닦는데 힘써야 한다는 파가 있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취기가 오르면 답도 없는 이 문제를 두고 각각의 파가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며 서로를 설득시키려 했다. 그래봤자 스무 살 조금 넘은 애들끼리 말이다. 신입생을 뽑을 선배가 될 참이니 무엇을 중점에 두어야 할지 그게 당시의 내 고민이었다.
배낭을 둘러메고 오이도행 지하철을 탔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드디어 도착. 어흠. 머릿속에 그려본 풍경과는 사뭇 달랐지만 뭐, 괜찮았다. 나는 생각하러 온 여자니까.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이왕이면 바다 한가운데 서서 고민을 정리하고 싶었다. 표를 끊고 배에 올랐다.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1층에는 실내 선실이 있었고 2층은 갑판이었다. 사람들은 1층 선실로 들어갔다. 되었다! 고독을 즐기기에 이만한 기회가 없을 터였다. 홀로 갑판에 올라갔다. 모터가 천천히 돌아가니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겨울바다 좀 춥다? 아아아악!
배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누가 내 양 싸대기를 때리기 시작했다. 아악! 그것은! 아악! 바람이었다! 아악! 뒤통수에 얌전히 붙어 있어야 할 머리칼이 아악!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앞이 보이질 않았다. 아악! 할 수 없이 뒤를 돌았더니 아악! 이번엔 바람 이 자식이 내 머리를 모세가 홍해 가르듯 양쪽으로 갈라서 뒤로 보내는 바람에 앞에서 보면 얼굴이 이등변삼각형이 되게 만들었다. 숨도 안 쉬어졌다. 급기야 '아악'이라고 내지르는 소리마저 공중에 흩어졌다 얼어붙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생각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겨울바람에 절단이 났다.
덜덜덜 떨리는 입술을 하고 바람 때문에 휘청이는 몸을 겨우 가누어 계단 옆 난간을 붙잡고 내려와 1층 선실로 들어갔다. 갑자기 따뜻한 공기를 접한 탓에 볼과 허벅지에 실뱀 지나가는 기분이 느껴졌다. 통증도, 가려움도 아닌 이상한 기분. 쑥대머리 여자애가 거기,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아, 겨울바다는, 생각을 하러 가면 안 되는구나, 생각을 버리러 가는 곳이로구나. 그래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바람에게 얻어맞은 덕분에 나는 동아리 부회장 역할을 잘 수행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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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에게 술을 많이 사 먹였다. 나에겐 사람이 먼저였다.
글쓰기로 우주 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이맘때쯤 떠오르는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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