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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an 11. 2024

당산동의 겨울

김치를 며칠 아니 몇 주 안 먹어도 별 문제없겠다 싶을 정도인 걸 보니, 한국을 떠난 지도 햇수로만 18년째가 가 됩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여기서 넘긴 달력 장 수가 한국에서보다 더하겠지요. 그럼에도 눈 감으면 떠오르는 건 어렸을 적 동네, 당산동의 풍경입니다.


눈을 감는다는 건 현실에서 떠나 공상과 추억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여서인 걸까요.

눈을 뜬 세상에선 보기 힘들지만, 눈을 감으면 어느새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눈앞에서 몸을 따스하게 해 줄 것이 닭고기 수프 정도에 불과하지만,

눈 저편에서는 목록 나열만으로도 하루 종일 보낼 수 있을만치의 먹거리가 넘쳐납니다:


집에서는 보글보글 끓다 탁 소리와 함께 벌어지는 시원하고도 구수한 모시조개 된장찌개며

짜글거리며 익어가는 빨간 김치찌개 속 부드러운 돼지고기. 

거리에선 붕어빵을 봉투에 담아주는 걸 못 참고 한입 급히 베어 물다 뜨거운 팥소에 혀를 데기도 하지요.


분식집에선 떡볶이며 순대, 만두 등이 김을 어찌나 모락모락 내는지 기어코 가던 발길을 돌리게 만듭니다.

쉬익 거리며 피어오르는 김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었어요.


떡볶이가 너무 졸아들지 않게끔 간간이 휘젓는 아주머니의 나무 주걱.

숭덩숭덩 썰어주는 순대를 먹을 때면 목이 메지 않게끔 오뎅 국물 한 국자 떠 종이컵에 퍼주었습니다.

매운 떡볶이에 뜨거운 국물까지. 입안에선 난리가 나지만, 추운 겨울 이보다 더 좋은 궁합은 없을 겁니다.


뜨거우니 후후 불다가도 식을까 봐 입술이며 혀, 입천장을 다 데면서도 좋아라 먹었지요.

친구는 기다란 오뎅을 끊어 먹다가 혀 된다고 헐떡 거리곤 했지요. 길거리 음식이지만 제대로 먹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스테인리스 간장통 속 파 쪼가리만 건져 올려 먹는 스킬을 보여줍니다.




겨울 날씨는 언제나 영하권이었고, 눈이 왔다 하면 그날 밤사이 여기저기 빙판이 생겼습니다.

다들 얼굴을 목도리 안에 푹 파묻고 펭귄이 되어 조심조심 걷습니다. 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으면 넘어질 때 크게 다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시리다 보니 한번 주머니에 들어가면 여간해선 다시 꺼내질 않았지요. 품속에선 뜨끈한 핫팩도 한몫했습니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2악장 라르고는 어쩌면 우리 집 앞 풍경을 보고 작곡한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한다 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동네의 겨울 풍경.


지금 사는 곳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그래서 추억에서만 존재하는 환영이자 착각. 이미 삼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니 정확할리가 없을 겁니다. 추억은 언제나 각색과 미화의 과정을 거쳐갑니다. 


하지만 착각이어도 좋으니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기억에서 오래도록 남겨졌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합니다. 그 덕에 지금도 추억의 주머니에선 행복이 송이송이 눈이 되어 어른이지만 어린 저를 덮어주고 있습니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 이맘때쯤 떠오르는 풍경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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