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영정 사진이 있다. 장례식용이었다. 고1 때 자가면역질환인 루푸스에 걸려 병원에서 몇 달을 보내야 했는데 그 끝에 의사들이 부모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드라마 속에서나 들을 법한 말을 들은 엄마, 아빠는 정신줄을 놓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장례 준비는 해야 했기에 고등학교 입학 사진을 급히 인화했단다.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퇴원을 한 것이다. 용도가 없어진 나의 영정용 사진을 본 것은 퇴원 후 집에 와서다.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시름시름 아팠지만 병의 원인을 몰라 감기약만 퍼먹던 때라 사진 속 내 입술은 허옇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으며 들고 있던 꽃다발조차 처연하게 느껴졌다.
이미 휴학을 했던 터라 몇 개월 쉬다가 이듬해에 복학을 했다. 그 후로 새 친구를 사귀고 합창반을 하며 병원에서의 기억은 빠른 속도로 지워져 갔다. 평생 정기검진 하고 약을 먹으며 살아야 하지만 다시 숨을 쉬고 일상을 살 수 있다는 현실 앞에서 그깟 짓 것쯤은 대수가 아니었다.
1년 전부터 시작된 <미니멀 라이프 프로젝트> 덕분에 사진 정리를 하다가 열일곱의 아이를 다시 만났다. 표정은 한결같지만 이번엔 내게 묻는 것 같았다.
"어머 너, 마흔 넘어서까지 살아 있는 거야?"
마흔이 넘은 내가 대답한다. 응. 잘 늙어가고 있네. 나 글도 쓰고 책도 냈어. 초등학교 때 독후감 써오라면 줄거리만 잔뜩 쓰다가 맨 마지막에 '그래서 참 재밌었다'만 붙이던 내가 이러고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인생은 재밌어.
다시 열일곱의 내가 묻는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걱정이야 늘 많지. 사는 건 행복과 걱정이 번갈아 가며 펼쳐지는 드라마더라. 늘 행복하지도 늘 불행하지도 않아. 요새 핸드메이드 사업 매출이 확 떨어져서 마케팅을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어. 한번 세팅하면 더 손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 변화에 발맞추기가 쉽지 않네.
"후훗 다행이다. 그런 걸 걱정이라 부르며 살고 있어서. 열심히 생각해.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실패도 해보고 잘 안되면 좌절도 좀 하다가 다른 방법을 찾으면 돼. 살아 있으니 뭘 못하겠니."
살아 있으면 뭘 못하겠니. 살아 있으면. 세상을 끝낼 뻔했던 열일곱의 내가 하는 말을 되뇐다. 갑자기 며칠 동안 했던 근심, 걱정이 깃털처럼 느껴진다. 이조차 행복의 한 조각 같다. 실패할 기회, 좌절할 기회가 주어짐에 감사한다.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가 우주보다 더 큰 선물이었음을. 포장 뜯고 얼른 만끽하러 가야지.
알고 보니 이 글은 #모노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