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한국에 갔다. 기러기 부부 1년 차. 이번엔 공항에서 울지 않았다. 지난 1년간 4번의 이별을 하면서 조금은 익숙해진 덕분일까. 눈물은 드라마 볼 때 흘리려고 아껴두었다. 그는 금요일에 도착하여 월요일부터 출근했다. 하루에 두세 차례씩 화상통화를 하는데 며칠 전 이런 말을 했다.
"시차적응이 옛날만큼 빨리 안돼. 나이 들었나 봐."
만 47세 남자가 자신의 노화를 안타까워하며 소화도 잘 안되네, 저녁 약속이 주르륵인데 맘껏 먹지도 못하네 푸념을 늘어놓는다. 원래 시차에 적응하려면 일주일은 걸리는 법이라고 위로했지만 화상 너머 나타난 그의 양 볼에 없던 주름이 생긴 게 보인다. 바로 옆에 있을 땐 몰랐는데 멀리 떨어지니 그것만 눈에 띈다.
당신이 늙긴 했구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스물다섯, 스물여섯. 젊다 못해 어린 티 폴폴 내던 청춘이었는데.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며 각자의 방식대로 늙어가고 있다는 게 훅 와닿았다. 게다가 소화가 잘 안 된다고? 음식 앞에서 당황했을 남편을 생각하니 짠해졌다.
그는 대식가였다. 밥 두세 공기는 기본이고 국물 라면은 2-3개, 비빔면 같은 건 3-4개를 끓여도 거뜬히 먹던 사람이었다. 어딜 가도 음식 남기는 걸 싫어해 남은 반찬까지 싹싹 해치우던 남편이었지만 조금씩 양이 줄기 시작하더니 이번 겨울 영국에 왔을 때는 일반인처럼(?) 밥 먹는 걸 보고 놀라기도 했다.
눈의 노화도 나보다 그에게 더 빨리 찾아왔다. 둘 다 안경을 쓰지만 나는 아직 하나로도 거뜬한데 남편은 서너 개를 가지고 돌려 쓴다. 독서용, 운전용, 등산용, 일상생활용 노안에 맞춘 안경이 많아졌다. 그러면서도 계속 침침하다며 온 집에 불이란 불은 다 켜서 환하게 만들곤 했다. 그것도 퍽 안 됐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편 눈에 비친 내 모습 역시 탱탱했던 젊음을 뒤로하고 눈꼬리가 처지고 가슴도 처지고 기미에 주근깨에 여기저기 쑤신다고 "에구구"를 연발하는 불쌍한 아내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불쌍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측은지심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안다.
박해영 작가가 쓴 드라마의 단골 소재기도 하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게 사랑이 되는 마음. <또 오해영>에서도 그랬고 <나의 아저씨>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상대를 짠하게 여기다 결국엔 마음을 주고받는다. 남녀 간의 사랑이든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이든. 가장 최근 작품인 <나의 해방일지>에서 기정이 태훈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대사가 나온다.
불쌍해서 끌리면 안 돼요?
사람 감정이 이건 연민, 이건 존경, 이건 사랑
이렇게 딱딱 끊어져요?
어 난 안 그렇던데? 다 덩어리로 있던데?
나 태훈 씨 존경해요.
연민도 하고 사랑도 해요. 다 해요.
불쌍해서, 짠해서, 측은해서 끌리는 마음이 생기면 잘해주게 된다. 신경이 쓰인다. 왜냐하면 너무 안 됐으니까. 가여우니까. 안아줘야 할 것 같고 등도 쓰다듬어줘야 할 것 같다. 남편과 그렇게 늙어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연민도 하고 존경도 하고 사랑도 하면서. 자비도 베풀고 적선도 하고 가끔은 구박도 하면서. 서로서로 그러면서.
남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나름의 노후대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