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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Mar 09. 2024

남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남편이 한국에 갔다. 기러기 부부 1년 차. 이번엔 공항에서 울지 않았다. 지난 1년간 4번의 이별을 하면서 조금은 익숙해진 덕분일까. 눈물은 드라마 볼 때 흘리려고 아껴두었다. 그는 금요일에 도착하여 월요일부터 출근했다. 하루에 두세 차례씩 화상통화를 하는데 며칠 전 이런 말을 했다.   


"시차적응이 옛날만큼 빨리 안돼. 나이 들었나 봐."

 

만 47세 남자가 자신의 노화를 안타까워하며 소화도 잘 안되네, 저녁 약속이 주르륵인데 맘껏 먹지도 못하네 푸념을 늘어놓는다. 원래 시차에 적응하려면 일주일은 걸리는 법이라고 위로했지만 화상 너머 나타난 그의 양 볼에 없던 주름이 생긴 게 보인다. 바로 옆에 있을 땐 몰랐는데 멀리 떨어지니 그것만 눈에 띈다.  


당신이 늙긴 했구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스물다섯, 스물여섯. 젊다 못해 어린 티 폴폴 내던 청춘이었는데.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며 각자의 방식대로 늙어가고 있다는 게 훅 와닿았다. 게다가 소화가 잘 안 된다고? 음식 앞에서 당황했을 남편을 생각하니 짠해졌다.     


그는 대식가였다. 밥 두세 공기는 기본이고 국물 라면은 2-3개, 비빔면 같은 건 3-4개를 끓여도 거뜬히 먹던 사람이었다. 어딜 가도 음식 남기는 싫어해 남은 반찬까지 싹싹 해치우남편이었지만 조금씩 양이 줄기 시작하더니 이번 겨울 영국에 왔을 때는 일반인처럼(?) 밥 먹는 걸 보고 놀라기도 했다. 


눈의 노화도 나보다 그에게 더 빨리 찾아왔다. 둘 다 안경을 쓰지만 나는 아직 하나로도 거뜬한데 남편은 서너 개를 가지고 돌려 쓴다. 독서용, 운전용, 등산용, 일상생활용 노안에 맞춘 안경이 많아졌다. 그러면서도 계속 침침하다며 집에 불이란 불은 다 켜서 환하게 만들곤 했다. 그것도 퍽 안 됐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편 눈에 비친 내 모습 역시 탱탱했던 젊음을 뒤로하고 눈꼬리가 처지고 가슴도 처지고 기미에 주근깨에 여기저기 쑤신다고 "에구구"를 연발하는 불쌍한 아내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불쌍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측은지심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안다. 


박해영 작가가 쓴 드라마의 단골 소재기도 하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게 사랑이 되는 마음. <또 오해영>에서도 그랬고 <나의 아저씨>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상대를 짠하게 여기다 결국엔 마음을 주고받는다. 남녀 간의 사랑이든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이든. 가장 최근 작품인 <나의 해방일지>에서 기정이 태훈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대사가 나온다. 


불쌍해서 끌리면 안 돼요?
사람 감정이 이건 연민, 이건 존경, 이건 사랑
이렇게 딱딱 끊어져요?
어 난 안 그렇던데? 다 덩어리로 있던데?
나 태훈 씨 존경해요.
연민도 하고 사랑도 해요. 다 해요.

불쌍해서, 짠해서, 측은해서 끌리는 마음이 생기면 잘해주게 된다. 신경이 쓰인다. 왜냐하면 너무 안 됐으니까. 가여우니까. 안아줘야 할 것 같고 등도 쓰다듬어줘야 할 것 같다. 남편과 그렇게 늙어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연민도 하고 존경도 하고 사랑도 하면서. 자비도 베풀고 적선도 하고 가끔은 구박도 하면서. 서로서로 그러면서.


남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나름의 노후대책이다. 




새해에는 흘러가는 시간을 잠깐 멈추어 세워 나의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의미 없이 지나친 순간도 그러모으면 하루를 사는 비타민 한 줌이 될 거라 믿어요. 아무리 바빠도 매일 글 쓰는 작가 여섯이 꾸려가는 공동매거진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구독하고 당신의 일상에도 영양을 듬뿍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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