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 잘 살면 재미없지 않겠어?

권희정 열사 30주기를 기념하며

by 영글음

어떤 인연은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시작되기도 한다. 희정 언니와의 만남이 꼭 그랬다. 생의 기운이 대기를 가득 메웠던 96년 4월 7일, 성신여대 학내에 전해진 죽음의 소식은 생뚱맞기 이를 데 없었다. 92학번 한 선배가 학원 자주화 투쟁을 하다 단식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하필 며칠 전 고대 친구로부터 약속된 미팅을 취소해야겠다며 다음과 같은 연락을 받은 뒤였다.


“데모하러 갔는데… 연대 학생이, 죽었어…. 경찰의 토끼몰이에 그만….”


혼란스러웠다. 문민정부 시대에 왜? 목련이 지고 개나리가 피기 시작한 교정은 아름답기만 했는데. 나는 96학번 신입생이자 과 대표였다. 수업에 들어가려는 같은 과 학생들을 모아 교내 집회에 참석했다. 그때 만났다. 희정 언니, 희정 선배 대신 권희정 열사라 불리는 한 꽃 같은 선배를. 그렇게 나의 대학생활은 연대 노수석과 성신여대 권희정을 열사로 받아들이며 시작되었다.


물론 열아홉의 나는 몰랐다. 몇 년 후 ‘권희정 추모 사업회’ 집행부를 하며 삶에서 희정 언니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될 줄은. 중년이 되어서도 가던 길 멈추고 뒤를 돌아볼 때 언니를 떠올리게 될 거라는 것 역시.


2026년 4월, 권희정 열사의 30주기가 다가왔다. 지나온 시간을 기념하며 『희정 - 92학번 권희정입니다』라는 제목의 평전이 도서출판 <걷는사람>에서 출간되었다. 소설가 박혜지 님이 지난 2년여 동안 수십 명의 관계자를 인터뷰하고 고증하며 써 내려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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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내가 알던 권희정은 강하고 반듯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책 속에서 언니는 그런 모습 외에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등장했다. 마음이 있는 남학생에게 수줍어 말 붙이기 힘들어하고 친한 친구에게 실언하여 고민하는 모습들. 그래서 좋았고 그 탓에 아팠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던 스물셋의 권희정을 단식이라는 강경한 방식의 투쟁을 선택하게 만들었던 우리 사회의 모순이 슬프게 다가왔다.


이 책은 권희정 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지만 동시에 1996년 전후 한국총학생연합회 아래 김영삼 대선자금 공개와 학원 자주화 투쟁 등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돼 있어 역사적 사료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혜지 작가님께 깊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언니가 떠난 지 30년이 되었다는 건 다른 말로 내가 어른이 된 지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는 의미다. 나는 지금 어른답게 살고 있을까. 고개를 쉽게 끄덕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매해 4월, 언니의 기일이 다가오면 조금은 자세를 바로하게 된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자 노력하게 되는 건 희정 언니 덕분이다. 목련꽃 옆에 선 언니가 묻는 것 같기 때문이다.


“혼자만 잘 살면 재미없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