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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Jan 26. 2016

게을러지고 싶은 날 2층 버스를 탔어

애 둘 엄마가 부리는 평일의 사치

그런 날이 있어. 마냥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날. 글 한 글자 쓰기 싫고 책도 지겹고 밥 해 먹는 것도 귀찮은 날. 할 일은 많은데 한없이 멍 때리고 싶은 날. 길거리 풍경을 보며 바람 소리를 상상하고픈 날. 손에 아메리카노가 있으면 더 좋겠지. 그날은 그런 날이었어.      


병원에 가야 했어. 루푸스 정기검진 날이었거든. 에든버러 성 북쪽에 있는 그곳까지 가려면 자동차로 25분쯤 가야 해. 나는 운전대를 잡는 대신 2층 버스를 탔어. 1.5파운드 주고. 두 딸들과 탔을 땐 늘 그들이 차지했던 자리에 앉았어. 2층 맨 앞자리였지. 이 나이에 앞자리 앉았다고 쾌거를 부르는 내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어.       


시선이 한 층 올라온 딱  그만큼 마음이 붕 떴어. 동전 넣고 놀이 기구의 버튼을 누른 기분이랄까. 가만히 앉아 있는데 눈앞의 배경이 다가왔다가 뒤로, 뒤로 물러났어. 정류장에 설 때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경했어. 그들은 나를 못 보았지. 그게 묘한 쾌감을 불러왔어. 나를 숨기되 세상은 관찰하고픈 마음,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관음증이 있다더니 내가 그 짝인가 봐.     


가로수가 도로에 바짝 붙은 건지, 나무가 제 몸뚱이를 너무 많이 벌려 놓은 건지, 버스 창문에 가지가 부딪히며 따다닥 소리를 내는 거야. 2층 버스가 대부분인 이 도시에서 나무들은 버스가 올 때마다 그럴 텐데 아플까 안 아플까. 봄이 되어 잎이 생기고 나면 버스 창문에 초록의 향기를 묻힐 것 같아.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었어.

     

“에든버러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회색빛 도시야.”      


그것만이 전부인 줄 알았어. 버스가 도심을 가로질러 병원으로 가는 동안 바라 본 풍경은 생소했어. 집 모양도 건물도 내가 사는 곳과 달랐어. 여기도 에든버러인가? 당연히 그랬지. 우물 안 개구리가 바로 나였어. 아직 탐색할 곳이 많이 남아 있다는 즐거움이 스멀스멀 올라왔어.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 양 떠들어 대는 것을 경계해야겠다는 자각도 함께.


               

담당 전문의를 만났어. 정기검진 날이라 몇 가지 검사만 했어. 요즘 별다른 증상은 없냐고 묻길래 몇 가지를 이야기했더니 의사가 주치의를 만나보래. 천식 같다고. 어른이 되어도 천식에 걸릴 수 있는 거였구나. 어쩐지 작년 말부터 시작된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싶었는데. 위스키 같이 독한 술을 마실 때 가끔 목에 켁 걸리면서 숨을 못 쉴 것 같은 증상도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었어. 다시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데 기침할 때마다 가슴 윗부분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어. 남편에게 말했어.  


"나 천식이래. 주치의랑 예약 잡았어."

"정말?"

"이것 봐. 의사가 써준 거야. Eczema"

"천식에는 th가 들어갈 텐데."

"?!"


Eczema는 피부 습진, 천식은 Asthma.  의사에게 가슴 앞 부분이 심하게 가렵다고 했었거든. 분명 천식이라고 한 줄 알았는데. 내 기침 소리를 들었다 생각했는데. 인터넷 사전을 열고 여러 번 들었어. 엑스마나 에쓰마나 내 귀엔 매 한 가지. 영국 사는 것 만만치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은 하루였어. 천식만 아니었다면 더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 텐데 괜스레 마음이 복잡해져서 병원 예약하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나 고민했던 게 아까워 죽을  뻔했지. 


평일 낮 2층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는 사치를 조만간 또 부려봐야겠어. 

게을러지고 싶은 순간을 기다렸다가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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