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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Jan 13. 2016

기부의 나라 영국에서
나눔을 생각하다

영국 기부문화의 꽃 채러티 숍

     

기부? 우리 식구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웬열,
기부하려면 나한테 하라고 해.     


그랬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기부 같은 건 돈이 많거나 숭고한 정신세계를 가진 자들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남편 따라 건너간 미국 유학시절엔 저소득층에 속했기 때문에 주에서 주는 혜택을 받은 적도 있었다. 내 살림을 시작한 후 돈 걱정에서 헤어 나온 적이 없는데 남을 위한 기부가 웬 말이냐고.

      

나누는 삶, 멋진 말이다. 나도 좋아한다. 외국 생활을 하는 동안 친한 사람들 불러 식사 대접 자주 했다. 맛있는 반찬은 나눠 먹었다. 우리집에서는 쓰임새가 없지만 멀쩡한 물건들 다른 집에 숱하게 주었다. 뭘 바라고 그런 건 아니었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상대방과 나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었다. 혹은 이 정도는 베풀 줄 아는 인간이라는 자부심 유지를 위해. 물론 이런 건 기부라 하지 않는다. 말장난을 보태면 그건,      


기부가 아니라 기브(Give)였다. 언젠간 Take를 바라는. Give And Take.    

  





기부 활동을 즐기는 영국인들 


오른손이 한 일은 왼손도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내가 영국에 왔다.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다. 첫째 아이가 다니기 시작한 초등학교에서 시시 때때 기금 마련 행사를 했다. 학교 운동장 놀이 시설 확충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물품 기부를 요청하는 이메일이 자주 왔다. 엄마들은 빵과 쿠키를 구워와 운동장에서 팔았다. 나는 ‘퀴즈 나이트’에 참가해 다른 학부모들과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들리지도 않는 영어 퀴즈 풀기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학교에서 주최한 크리스마스 바자회에서 학생들이 만든 장식품도 샀다. 그리고 지난여름, 운동장에 새 시설이 생겼다.     


기존의 운동장에 모래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언덕, 놀이 시설 등이 새롭게 생겼다 


결국 학부모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을 모아 놀이터를 지은 것이다. 3파운드, 5파운드, 20파운드, 12파운드, 내가 보탠 돈도 거의 50파운드에 달했다. 만약 여러 차례에 걸쳐 학부모들이 기부한 돈을 한 번에 냈더라면 어땠을까? 금방 모이지 않았을까? 아니면 소액의 돈을 몇 개월 간 내겠다는 약정을 해서 자동이체를 했으면 번거로운 행사는 안 해도 좋았을 텐데.      


둘째 아이 어린이집에서 한 엄마가 자기 집에서 티파티를 열었다.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음식을 가져왔다. 모두들 오자마자 테이블 가운데 놓인 저금통에 3파운드씩 집어넣었다. 그건 어린이집 운영을 위해 쓰일 돈이라고 했다. ‘공립 어린이집이잖아. 이런 건 교육청 예산에서 마련해야지.’ 나는 의아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기쁘게 지갑을 열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떤 이는 마라톤을 해서 치매예방재단에 기부할 것이라 알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기금을 모으기도 했다. 내 보기엔 얼마 모이지 않았는데도 기부를 주최한 사람은 모인 금액을 알리고 자랑스러워 했다. 마라톤과 치매예방의 관계? 없어도 된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쉽게 기부 행사를 열 수 있다.     


영국 살이 1년 반, 처음에는 의문투성이였던 것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영국 사람들에게 기금 마련, 기부 같은 것은 단순히 돈을 모으는 게 목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걸 계기로 해서 행사를 열고 친목을 다지면서 과정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그건 사회활동의 수단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조금씩 보태는 문화는 일상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2015년 11월에 발표된 CAF(Charities Aid Foundation) 자료를 보자면 각 나라별 기부지수에서 영국은 6위를 했다. (우리나라는 64위) 이런 기부문화 한 가운데에는 채러티 숍이 있다.      






주는 것도, 사는 것도 기부가 되는 채러티 숍  


채러티 숍은 중고물품을 파는 가게다. 채러티(자선)이라는 단어에서 감을 잡을 수 있듯 이곳은 사회적 기업의 한 형태다. 판매 물품의 85% 이상이 기부를 받은 것이다. 수익금은 대부분 사회에 환원된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가게>가 영국의 대표 채러티 숍인 옥스팜을 본 딴 것이다.      

  

OXFARM은 전 세계 식수와 식량, 홍수와 전쟁 등의 문제가 생겼을 때 돕는 곳이다
British Heart Foundation은 심장병 치료 연구를 후원한다
CANCER RESEARCH UK는 암 예방과 치료 등이 목적이다. 그밖에도 노인이나 아이,  군인, 수의사를 돕는 등 분야가 다양하다


현재 채러티 숍은 잉글랜드에 8,500개, 스코틀랜드에 900개 등 영국 전역에 걸쳐 10,000여 개의 지점이 있다. 숫자로 나열하니 감이 안 올 텐데, 내가 사는 동네는 발에 체이는 게 채러티 숍이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둘째 아이 어린이집까지 8개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채러티 숍에 들어가게 되었고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마니아가 되었다.         



물가 비싼 영국에서 중고라지만 물품을 싼 가격에 살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갈 때마다 ‘오늘은 어떤 물건이 있을까?’하고 기대하는 것도 즐겁다.  기부받은 물건을 팔다 보니 매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떤 물건이 진열돼 있을지 짐작이 어렵다. 기부는 기부하는 사람 마음이니까. 채러티 숍은 그래서 늘 새롭다. 


영국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영국 집에서는 이런 인테리어를 해 놓고 사는구나, 저런 그릇을 쓰는구나, 퍼즐과 보드게임은 왜 이리 많을까, 누구네 집에 놀러 간 것 같기도 하다.      


채러티숍에는 웨딩드레스, 일식집 간판 같은 특이한 물건도 있다


우리 동네 매장은 대개 붐빈다. 나처럼 오다가다 들르기도 하고 여행 기념품을 사려고 찾기도 한다. 나이 든 이들도 많지만 젊은이들도 자주 이용한다. 물건을 기부하려고 오는 사람도 많다. 영국인들은 어릴 때부터 채러티 숍을 경험하며 자연스럽게 기부와 나누는 문화를 체득한다. 이곳에서 연간 2억 9천만 파운드(한화 기준 5,110억 원)의 기금이 마련된다.   






돈이 없어도 기부할 수 있다

     

기부? 우리 식구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웬열,
기부하려면 나한테 하라고 해.   

  

그때 채러티 숍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왕년의 몸매를 되찾겠다면서 몇 년째 장롱에 쟁여 놓은 옷들 어쩔 거야? 예쁘다고 샀다가 구석에 팽개쳐둔 인테리어 소품들은? 작아진 아이들 옷과 연령 지난 장난감은 버릴래? 다 싸들고 이리로 와. 기부해. 좋은 일이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줘.     


나는 대답했다.      


“안 돼. 그게 돈으로 환산하면 얼만데 공짜로 기부하라고? 살은 곧 뺄 거야. 게다가 이것들 살 때 진짜 고심했단 말이야.”      


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다 무용지물이야. 기부는 어려운 게 아니야. 가진 돈이 없어도 돼. 물건으로 할 수 있잖아. 귀찮다고 버리지 말고 가지고 와. 나누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그래도......."

  

채러티 숍에는 중고물품이 대부분이지만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물건도 자주 나왔다. 내가 필요하던 것이었는데 싼 값에 일명 ‘득템’했을 때는 기분이 째질 것 같았다. 내가 갖고 있는 것들, 차마 버릴 수 없었던, 하지만 절대 쓰지 않는 것들을 박스에 담았다. 지인들에게 나눠 주고도 남은 것들이 몇 박스가 되었다.  

   

“알았다, 다 가져가라!”      


집이 넓어졌다. 더 이상 그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 버려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어졌다. 부디 좋은 주인 만나 제 몫 톡톡히 하기를. 나처럼 통속적인 사람도, 가진 돈이 없어도, ‘사회 환원’ 같이 거창한 목표가 없어도 기부할 수 있다는 것을, 영국에서 배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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