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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Jan 04. 2016

3억 5천 년 된 아서시트,
작은 하일랜드

에든버러 유명 관광지이자 우리집 뒷동산

꼭대기에 오르니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 어디서나 부는 스코틀랜드 바람이지만 사방이 뻥 뚫려 있다 보니 강도가 훨씬 셌다. 방풍 점퍼를 입었는데 이럴 수가, 역효과가 났다. 고속도로 주유소 앞에서 팔다리를 흔들며 춤추는 인형처럼 나는 점퍼 안으로 바람을 한껏 받아들이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한번 들어온 바람은 빠져나갈 줄 몰랐다. 풍선처럼 걸어 다녀야 했다.      



두 딸들은 바람과 친해지는 법을 금세 익혔다. 얇은 옷 하나 걸치고도 바람이 전혀 없는 것처럼 웃고 뛰고 달렸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씽씽 바람소리와 섞여 아서시트 언덕 곳곳으로 퍼졌다. 


넘어져, 조심해! 


근심 어린 내 목소리는 아이들에게 가 닿지 못했다. 이곳은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자 사시사철 여행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왼쪽 높은 봉우리가 아서시트(Arthur's Seat)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는 하나 250m밖에 되지 않는다. 100m 달리기를 두 번 반만 하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언덕이라 하기엔 높고, 산이라고 하기엔 조금 낮은. 가장 가파른 길을 택해 올라가면 정상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물론 아서시트가 있는 홀리루드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려면 반나절 이상 필요하다.    

   

아서시트는 3억 5천 년 전에 화산 폭발로 만들어졌단다. 고생대 중에서 다섯 번째인 석탄기에 생겼다는 말이다. 겨우 40년 남짓을 살아내고 있는 나에게 ‘3억 5천 년’은 ‘3억 5천만 원’ 만큼이나 먼 이야기다. 억겁의 세월을 지나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다.      

 


나는 아서시트를 뒷동산이라 한다. 집 뒤에 있으니 그렇게 부른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집은 홀리루드 공원 앞에 있으며, 집을 나설 때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눈앞에 아서시트가 떡 하고 서있다. 그게 참 좋다. 영국 와서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새 집을 찾아야 했다. 집세와 아이들 학교 거리가 지금 집을 구하는 데 결정적이었지만 아서시트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건 놓치기 싫은 매력이었다. 다행히 기회를 잡았다.       



이 오래된 언덕은 낮지만 위엄 있게 서 있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채도가 낮은 카키색 식물이 납작 붙어 자라는 덕에 발랄‧유쾌한 친구보다는 진중한 선배의 모습이다. 걸어서 올라가도 좋은데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특히 엎드린 사자 모양을 한 아서시트를 보고 있으면 든든한 호위무사가 지키고 서 있는 것 같다. 육체가 고단하고 마음이 불안할 때 언덕을 보며 위안을 얻은 게 몇 번이었던지.  

     

아서시트는 나와 처음부터 함께였다. 영국에서 처음 구한 집 주방 창문으로 이 언덕이 보였다. 낯선 땅에서 이질적인 사람과 문화를 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아서시트는 늘 근사했다. 아래 사진에서 집들이 모여 있는 창밖 풍경에 아서시트가 없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밋밋하고 퍽퍽했을까. 그랬다면 내가 영국 땅에 정을 붙이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집에서 가까운 덕에 홀리루드 공원에 산책을 자주 갔지만 아서시트까지 올라가 본 것은 딱 한 번밖에 없다. 우리집 쪽에서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이제 막 4살이 된 둘째를 데려가기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둘째 딸은 나보다 더 빨리 올라갔다.    

    

아서시트를 오르며 감상할 수 있는 에든버러 전경
아서시트 정점에 오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전방위에서 모인다 


아서시트 정점에서 바람에 맞서고 나면 에든버러 도시가 한 눈에 보인다. 중세‧근대와 오늘의 문화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곳, 인간의 건축물과 자연의 신비가 어우러져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끝에 바다가 보인다. 그렇지, 도심에 비둘기보다 갈매기가 더 많은 것은 바다 때문이었지. 땅에서는 보이지 않는 바다를 보니 영국이 섬나라임을 실감했다.      



바다 너머 육지를 따라 쭉쭉 올라가면 하일랜드가 나올 것이다. 어느 여행책자에서 아서시트를 하일랜드풍의 언덕이라 칭했다. 규모가 다르긴 하지만 분명 닮은 구석이 있다.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는데 하일랜드까지 갈 여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서시트에라도 꼭 올라가 보길 권하고 싶다. 그런 이유가 아니어도 좋다. 스코틀랜드의 세찬 바람을 맞다 보면 머릿속이 맑아지며 무념의 상태가 되니 근심, 걱정 던지기에 썩 괜찮은 장소다.  


두 딸들은 집에 돌아갈 때도 바람처럼 사뿐히 달려 내려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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