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글음 Dec 28. 2015

스코틀랜드 바람과 새 외투의
의미심장한 관계

옷이 많은데 왜 또 샀느냐고?

허벅지를 살짝 덮는 남색 야상 점퍼를 하나 장만했다. 안쪽으로 지퍼 라인을 따라 보드라운 베이지색 털이 달려 있는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한 집에 사는 남자는 “집에 그거랑 비슷한 거 많지 않으냐”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글쎄올시다. 뭐가 비슷하단 말인지. 비록 우리 집 장롱을 열면 한국에서 가져온 코트와 재킷, 점퍼가 꽤 걸려 있긴 하지만 그것들과 새 옷은 달라도 너무 다르단 말이다. 

       

옆지기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직장을 구해 이사를 준비할 무렵 여기저기서 숱하게 들었던 말이 있다. 영국은 하루 종일 비가 온단다, 뻑하면 흐려서 우울증 환자가 많다니까 너도 조심해라, 그런 날씨 적응할 수 있겠니....... 많은 이들이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며 걱정스레 말하곤 했다. 오기 전부터 날씨 걱정이 태산이었다. 1년 살아 보니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비가 자주 오긴 한다. 하지만 하루 종일 오는 건 흔치 않았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에 새 하얀 양떼구름도 자주 봤다. 그러므로 영국 날씨를 제대로 표현하려면 이래야 한다.      

지랄 맞은 변덕쟁이     

날씨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바뀐다.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열두 번 이상 바뀌는 날이 있다. 해가 떴다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내리는가 하면 다시 해님 방긋, 무지개 떴는데 또 비. 어쩔 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맑은 하늘이, 왼쪽으로 돌리면 우중충한 하늘이 동시에 펼쳐지기도 한다. 변화무쌍한 하늘을 보고 있자면 변심한 애인이 용서해 달라고 왔다가 다시 떠나가는 것만 같다. 밖으로 막 나왔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거나 우산을 펼쳤는데 햇빛이 들면 정말이지 배신감 같은 게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지만 영국 날씨의 주연 배우는 따로 있다. 


바람, 바람, 바람. 


그렇게 자주, 세차게 불어 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도 바람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바람이 뒤에서 불면 걷지 않아도 걷게 된다. 앞에서 불면 애써 매만져 놓은 머리가 철수세미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자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건널목을 건너는데 바람이 앞뒤로 불어 대는 탓에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고 도로 한 가운데 서 있기도 했다. 아이를  덮어놓은 담요가 하늘 높이 날아오를 건 뭐였담.      


최악의 상황은 비와 바람이 만났을 때다. 이 둘이 합작 공세를 펼치면 우산을 써도 쓴 것이 아니요, 까딱하다간 뒤집어진 우산을 잡고 바람이 끄는 데로 질질 끌려가기 십상이다. 이런 날 우산은 한낱 들고 다녀야 하는 막대기일 뿐이다. 오히려 짐이다.         


해가 떴는데 비도 내리고 바람도 세찼던 어느날 아침  - 우산을 쓴 사람은 없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곳 사람들은 웬만해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 모자 달린 외투 하나 입고 다니다가 비가 오면 모자를 뒤집어쓰고 걷는다. 비가 멈추면 모자만 벗으면 끝이다. 대신 옷 재질은 방수처리가 된 게 많다. 작년 겨울, 따뜻하지만 방수 안 되는 한국 외투를 입고 유모차 끌고 다니면서 비를 맞아 보니 흠뻑 젖는 건  시간문제였다.

  

자, 이제 이번에 산 점퍼로 돌아와 볼까. 이 옷은 방수가 잘 되고 모자가 깊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일지라도 모자가 깊지 않으면 안경에 미세한 수분 알갱이가 붙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옷이 가득한 장롱을 열면서 “입을 거 하나도 없네”라고 말하는 여자들의 심리 때문이 아니라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스코틀랜드에 가면 스코틀랜드의 문화를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잘 지킨 것이다!      


물론, 2할 정도는 새 옷을 입어보고 싶은 욕구가 작동한 탓이기도 했다. 

외투를 산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