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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Feb 09. 2016

애덤 스미스를 만나는 시간

에든버러 그의 동상‧묘지‧생가 찾기 그리고 「도덕감정론」 

빗줄기가 굵었다가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던 어느 겨울 아침, 애덤 스미스를 만나러 갔다.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올드 타운 로열 마일 한 복판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에든버러에 온 후로 서른 번도 넘게 봐온 동상이지만 오로지 애덤 스미스를 보겠다고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리 곳곳에 전날의 흔적이 담긴 쓰레기봉투가 모여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복작대던 평소와 비교되어서 그런지 수분 가득한 공기에 적막함마저 감도는 듯했다.             


“애덤 스미스 씨, 안녕하세요? 오늘은 머리 위에 갈매기가 없군요.”      


늘 심각한 표정으로 높은 곳에 올라서 있는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바다가 가까운 이 도시에 동상으로 서 있으려면 갈매기나 비둘기를 벗으로 삼아야 한다. 더불어 그들의 배설물까지 즐겨야 한다. 오랜 세월 그것들과 하나가 된 탓에 동상에는 절묘한 흰 줄무늬가 생겨났다. 비가 세차게 내려도 웬만해서는 지워지지 않는 무늬다.      


에든버러 로열 마일에 있는 애덤 스미스 동상, 1월 말


갈매기가 앉아 있는 애덤 스미스 동상, 지난 여름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커콜디에서 태어나 글래스고대학교, 옥스퍼드대학교 밸리올 칼리지에서 공부한 뒤 글래스고대학교에서 논리학, 도덕철학을 가르쳤다. 훗날 학장도 지냈다 한다. 그러다가 1778년 에든버러의 관세 위원이 되어 생애 마지막 12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그 덕분에 도시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최근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교수 러셀 로버츠가 쓴 책인데,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현대인의 삶에 맞게 쉽게 풀어서 쓴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는 애덤 스미스에게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그를 잘못 알아도 한 참 잘못 알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도덕감정론」은 보이지 않는 손, 자유방임주의, 국부론, 고작 이런 단어 몇 개로만 알고 있던 그의 사상이 아니었다.


바로가기: 돈과 명예보다 중요한 것 -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러셀 로버츠 지음

             

몇 해 전에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 있는 아이디어」를 읽고 그가 비인간적인 시장만능주의자에다가 신자유주의의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경제학자가 아니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도덕감정론」 저자로서의 애덤 스미스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 부와 명예를 쌓는 대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들, 자본주의가 제대로 서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 등등....... 그가 경제학자 이전에 도덕철학자였다는 사실이 가슴에 와 닿았다. 잠시 비가 그쳤다.     

   


애덤 스미스의 묘비명, 유언대로 되었을까


동상에서 몸을 돌려 로열 마을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두 번째 목적지는 그가 잠들어 있는 묘지다. 꼭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에든버러에 묘지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가본 적은 없었다. 


캐논게이트 커크 교회 외관(Canongate Kirk)


10분쯤 내려가다 보면 왼편에 캐논게이트 교회가 있다. 교회 뒤편 공동묘지 어딘가에 애덤 스미스가 있다는데 아무런 안내판도 보이지 않았다. 찾을 수 있을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땅은 질퍽했다. 후- 호흡을 가다듬고 교회 건물 오른쪽 묘지부터 돌기 시작했다. 비가 다시 내렸다. 나는 모자를 꾹 눌러쓰고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묘비에 적힌 이름을 훑고 다녔다. 애덤 스미스, 애덤 스미스. 흡사 좀비 같았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묘비에 "도덕감정론의 저자, 여기에 잠들다"라고 새겨지길 원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이 책을 아꼈다는 뜻인데 그의 묘비명, 유언대로 되었을까? 찾았다! 


거짓말처럼 맨 마지막에 확인한 묘지가 그의 것이었다. 함께 있는 다른 묘지와 달리 애덤 스미스의 것은 보호용 철제 울타리 안에 있었다. 반대편부터 찾았다면 제일 먼저 봤을 텐데.  


철제 울타리 안 애덤 스미스의 묘비가 있다 


서둘러 묘비에 적힌 문구를 읽었다. 돌 색이 군데군데 변한 탓에 읽는 데 애를 먹었지만 눈을 크게 뜨고 확인해 보니 그곳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 여기에 잠들다



이것은 유언대로 되었다고 봐야 할까 아닐까. 도덕감정론의 저자라는 문구가 있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국부론도 함께 언급했으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는 도덕감정론으로 유럽 전역에서 큰 명성을 얻었고 국부론 또한 마르크스를 비롯 여러 경제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니 둘 모두 중요한 저서임에는 틀림없다. 240년 전에 죽은 그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도덕감정론이 먼저 새겨져 있지 않나! 



그의 묘지 바닥에 다른 문구를 발견했다. 2006년에 <Adam & Company>라는 곳에서 기증한 돌판이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기증한 곳은 애덤 스미스를 기리면서 만든 은행이었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The property which every man has in his own labor, 

as it is the original foundation of all other property, so it is the most sacred and inviolable."


"모든 사람의 고유한 노동력은 재산을 만드는 근본적인 기초다. 

그래서 그것은 가장 신성하며 침범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노동 가치를 설명한 문구. 애덤 스미스가 남긴 말일 텐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집에 와  찾아보니 그것은 국부론에 있는 내용이었다. 자유 경쟁을 통해서 국가의 부를 증진시킨다는 국부론에 신성불가침한 노동에 관한 이야기가 있을 줄이야. 그를 알면 알수록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대로 안 적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읽고 보고 들은 걸 토대로 생각해 보자면 그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따뜻한 철학자였던 것 같다. 애덤 스미스에 관한  5분짜리 다큐-지식채널 e를 첨부한다. 그를 이해하는데 개미 눈물만큼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내게도 그랬다.   


참조: 지식채널 e - [경제 시리즈 시즌 3] 1부 최초의 위대한 경제학자


캐논게이트 야드 바닥에 박혀 있는 애덤 스미스 안내판, 무지 작아서 찾기 어렵다



애덤 스미스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곳, 팬뮤어 하우스

 

책「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을 읽다 보면 저자가 애덤 스미스와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이것은 저자의 상상력으로 구성된 것인데, 그때의 배경이 되는 곳이 애덤 스미스가 에든버러에서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이다. 팬뮤어 하우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생가가 이 도시에 남아 있는 줄도 몰랐다. 인터넷 창에 팬뮤어 하우스를  써넣고 나서 그것이 바로 묘지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캐논게이트 교회에서 나와  1분쯤 내려가다가 왼쪽 골목으로 꺾어지면 팬뮤어 하우스가 있다. 에든버러 유명한 관광지인 칼튼 힐이 올려다 보이는 한적한 주택가에 있었다. 애덤 스미스는 이곳에서 결혼하지 않은 채로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애덤 스미스가 생의 마지막 12년을 살았던 팬뮤어 하우스


팬뮤어 하우스 프로젝트를 알리는 안내판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마지막 멤버가 남아 있던 곳, 팬뮤어 하우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하지만 몇 년 후에 어쩌면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08년 헤리엇와트대학교의 비즈니스 스쿨이 이 집을 샀다. 현재 경제학 교육과 연구의 중심지로 복원하려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글로벌 기금 모금 방식으로 지원금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내부 공사까지 끝내고 국제경제센터를 열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수도 있다. (인테리어 계획의 일부 - 왼쪽: 미팅룸, 오른쪽: 리딩룸 / 이미지 출처: http://www.panmurehouse.org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 또 있는데, 생가 복원 기금 마련을 위해 2013년에 케임브리지대 명예교수인 제임스 멀리스와 리처드 월터 제10대 버클루 공작이 한국에도 왔었다고 한다. 그때 멀리스 교수는 오늘날 좌파, 우파 모두가 스미스에게 구애하는 현상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이 말이 딱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덤 스미스는 경쟁적이고 자유로운 세계를 지향한 점에서는 우파,
가난의 극복과 평등을 꿈꿨던 점에서는 좌파였다. 


에든버러에 있는 애덤 스미스의 흔적을 찾으며 조금은 더 그를 알게 된 것 같다. 그의 집을 떠나 내가 사는 집으로 향했다. 비가 완전히 그치고 해가 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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