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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녜 Feb 27. 2022

사실 나는 운이 좋다고 생각해

직무를 세 번이나 바꿀 수 있었던 건 운이 팔 할이었지

어느덧 일을 시작한 지는 칠 년 차. 주니어라고 하기도 시니어라고 하기도 애매한 그런 연차다.


그 애매한 기간 동안 거쳐온 직무는 벌써 네 가지. HR, 오퍼레이션, 데이터 분석, 그리고 지금은 PM. 길다면 길지만 또 짧다면 짧은 이 기간 동안 꾸준히도 바꿔왔다.


의도적으로 그랬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노하우가 있었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어찌어찌 찍혀있는 점을 잘 이어서 징검다리를 새로운 방향으로 계속 건넜을 뿐.


첫 직장에서 계속 있었다면 이제는 대리 2-3년 차, 그러니까 실무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알아야 하면서도 여전히 짬바가 생겼다고 으스대기에는 한참 모자란 인사 쟁이가 되었을 테다.


그곳에 있던 이년 이 개월 동안 선배들에게 나름 예쁨도 인정도 받았다만 사실 그 와중의 일 년 육 개월은 사실 탈출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해외영업으로 지원해서 면접도 다 그 부서 사람들이랑 봐놓고도 나를 엉뚱한데 배치되어버린 것이 황망하고 억울해서,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도록 막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서, 억울한 마음이 더 큰 억울한 마음을 불러와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회사 일은 회사 일이라서, 어쩌면 좋은 마음으로 잘 견뎌보았다면, 언젠가는 흠 사실 이 배치가 내게 나쁘지 않았군, 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 유약한 마음의 나는 도저히 내 결정대로 내 인생이 풀려가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직은 쉽지 않았다.

일 년 육 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온갖 자소서를 써내며 신입사원 공채로도 지원하고, 영어 레주메도 만들어 외국계도 써보고 크게 관심 없던 IT 회사들에도 지원했다. 이직 준비 기간이 길어질수록 탈 HR 만 되면 어디든 괜찮아! 하는 마음이 커져갔다. 그러면서도 탈락하는 곳이 늘어나니 이러다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도 이 온 회사들에서 거절당하면 받을 마음의 상처가 두려워 설렁설렁 준비할 때도 많았다. 치열한 구직시장에서 설렁설렁 준비한 것의 결과는 정말 얄짤없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자기 회사 칭찬을 하는 걸 보고 - 그 당시 내 친구들은 자기 회사 욕 밖에 안 하는 분위기였다 - 와 정말 좋은 회사인가 봐!라는 생각이 들어 이름도 생소하던, 지금의 회사로 이직을 했다.


지금 회사에서의 첫 직무는 오퍼레이션이었다.

오퍼레이션이라는 단어는 아주 마법 같아서, 특수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개발직군이라던지 재무 회계 직군이라던지 마케팅이라던지 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일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팀에서 맡고 있는 일이 잘 되게 하기 위한 모든 일을 해야 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엑셀을 잔뜩 들여다봤다가도, 비용 분석도 하고, 회사 내외부에 같이 일하시는 분들과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하기도 해야 했고 SQL을 어떻게든 배워내서 데이터를 추출하고 분석하는 일도 해야 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한 이직이니만큼, 두 번째 회사에서도 실패할 수는 없다는 두려움이 당시의 가장 큰 동기부여 요소였다.

뭐 하나라도 내 발목을 잡게 하는 게 싫어서, 주말엔 손으로 SQL 구문을 써가며 손 코딩으로 공부를 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팀의 역할도 늘어나서 사람도 함께 늘었는데, 일을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진입장벽이 낮은, 그러니까 데이터 분석 외의 다른 업무들을 넘겨드리고 내게는 분석 업무만이 남기 시작했다. 여전히 손이 모자랄 땐 잡다한 일을 거들었지만, 그래도 점점 나에게는 데이터 분석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빈도가 늘어났고, 회사 시스템상의 직무도 바뀌었다.


데이터 분석이라는 직무는 왠지 내게 팬시 하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내가 내리는 크고 작은 의사결정들이 왠지 정답이라는 확신을 내게 좀 더 준다는 점이 좋았다. HR을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이유는 그때 내린 결정들이 맞는 것이었는지 1년이 지나도 5년, 10년이 지나도 알 수 없다는 점이라고 하고 다녔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매우 정교한 예술 같은 것이지만, 불안감이 큰 사람에게는 그 상태가 너무 고역이었다. 게다가 초년생 당시의 나는 마치 나의 유일한 평가 척도가 어르신들이 주시는 예쁨이 전부인 것 같아서, 그래서 알랑 방귀를 열심히 뀌면서도 그러고 있는 내가 싫었다.

하지만 데이터 분석은 달랐다. 아주 명확한 인과관계를 밝혀낼 수 있는 경우는 매우 적지만, 상관관계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정성적인 주장에 힘이 실렸다. 내 말에 힘이 실리는 기분, 그게 그렇게 짜릿할 줄이야.


하지만 또 시간이 지나서는 다시 불안해졌다.

스스로에 대해 근본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근본을 채우려면 통계학을 더 잘 알거나, SQL 말고도 다른 언어를 알아야 한다는 강박이 들었다. 회사 선배들은 꼭 그렇지는 않다며, 엑셀만 할 줄 알아도 충분히 좋은 데이터 분석가가 될 수 있다고, thinking 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해줬지만 내 동년배 분석가들은 다 Python 이든 R 이든 을 이용해 온갖 유의성 검증을 했다. 나는 그 결과를 해석해나가는 데도 애를 먹었다. 독학은 못 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 학교를 가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다가도 발견하는 나는 엉덩이가 너무 가벼웠다. 일을 하면서 얻는 배움, 그러니까 당장 써먹기에 좋은 배움들은 어떻게든 해내겠는데, 당장의 사용으로 이어지지 않는 학문적인 배움을 이삼 년씩 해낼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쟁취해서 시작한 독립인데, 다달이 내야 하는 전세 이자를 생각하면 이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근로소득을 끊어서는 안 됐다.


그렇다면 내게 나아갈 방향은 하나였다.

이 스킬을 잘 활용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그리고 좋아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공부 없이도 경력을 쌓으면 인사이트가 같이 쌓일 수 있을 것 같은 직무는 무엇인가. 내가 데이터 분석을 하며 즐거웠던 건 “맞는 말 하는 것 같은 기분” 에서 왔고 그렇다면 “맞는 말”을 많이 하면 좋은, 제안을 하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그게 우리 회사에서는 PM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PM을 해보겠다고 했다.


이게 내가 네 번째 직무를 맡게 된 스토리다.

학생 때의 나는, 첫 직장에서의 나는, 이직을 준비하던 나는 대체 사람들이 무엇을 기준으로 일을 고르는지 무슨 힘으로 그 일을 계속해나가는지 혹은 일을 바꾸는지 궁금했다. 혹은 어떻게 하면 저 일을 하게 되는 건지, 정석 루트랄 게 있을지 궁금했다.

사실 학생 때까지는, 그리고 대기업에 입사할 때까지는 꽤나 많은 것이 클리어했으니까. 어떤 과목에서 어느 정도 점수가 나오면 어디에 갈 수 있고, 어떤 유형의 인적성 문제와 면접 과정을 통과하면 그 장소 그 위치에 도달할 수 있을지 공식 같은 게 있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일을 하면서 느낀다. 삶의 꽤나 많은 부분은, 내가 마치 설계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커리어의 많은 부분도, 사실은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주 많다고.

지금 나는 내 일을 좋아하고, 정말 잘하고 싶지만, 이게 정말 운이 잘 따라준 케이스라고.


앞으로의 나도 지금까지의 나만큼 운이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중간 어느 단계에서 또다시 운이 나쁘다고 느껴질 때 크게 좌절할 필요는 없겠다는 걸 안다. 내게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 지금의 회사처럼, 결국엔 운이 돌고 돌아 좋은 운의 나로 돌아올 수 도 있을 거라고, 믿을 힘이 이제 내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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