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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녜 Sep 09. 2018

물집이 생겼다

(또) 생겼다

지난주 산책을 하던 저녁이었다.


퇴근 후 운동을 하고, 집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산책하러 가야 하니까.


가방도 벗어놓지 않은 채 호두랑 한참을 부비적 거리다가, 산책 갈까? 한 마디를 꺼냈다.

(호두는 아직 산책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다. 밥도, 배고파? 도, 집에 가자도. 앉아, 기다려만 간신히 알아듣는 것 같은데, 이마저도 제스처의 도움이 아니면 헷갈려한다.)


호두는 잠시 서서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발걸음을 총총 현관으로 옮기니 펄쩍 뛰며 쫓아왔다. 보통 마당에서 놀다 내가 들어가면, 가방을 내려놓고 곧 나와 놀거나, 간식을 가져오거나, 산책을 나가거나였으니까. 그중 뭐라도 하겠지 싶어 한 거겠지, 추측했다.


집에 들어가 가방을 벗어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모자도 쓰고, 물통에 물도 채웠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신는데, 현관문 바깥으로 호두가 바짝 붙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와 호두에게 짜잔! 가슴 줄을 펼쳐 보였다. 호두는 빨리 나가자고 빙글빙글 돌았다. 얼른 가슴 줄을 채우고, 집을 나섰다.

저녁 산책은 아침 산책과는 또 다른 긴장이 있다. 요새 저녁 날씨 특히 선선하고 좋은 탓에, 산책하는 사람도 많고, 강아지도 많고, 아이들도 많다. 게다가 어두우니 나도 멀리 미리미리 보기 어려워서, 항상 조심 항상 긴장하게 된다. 그래도 이날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강아지도 거의 없었고, 웬일인지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이제 아주 어린아이들과 나오기는 꽤 쌀쌀해진 편이기 때문이려나. 혹은 너무 주중이라, 아직 다들 퇴근을 못했나.


그래도 언제 어디에서 강아지가, 혹은 자전거 떼가, 혹은 강아지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나타날지 모르니 계속 두리번거리며 걸어갔다. 그러다 저 멀리 뒤에서 푸들과 걸어오는 분이 보였다. 평화롭게 산책을 마치고 싶어서, 속도를 높여 멀어졌다. 총총 뛰기도 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기도 하고. 다행히도 호두는 뒤는 보지 못한 채 잘 따라와 줬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좀처럼 멀어지지 않았다. 호두는 냄새를 맡느라 정신이 없었고, 푸들은 열심히 직진 중이었기 때문에. 아마 다른 개를 좋아하는 친구처럼 보이긴 했다, 혹은 적어도 관심이 많은 친구. 멀찍이부터 다른 강아지에게 훅 가려가다 보호자 분이 "안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호두도 쫄보지만, 관심은 많아서 자기보다 작은 친구에게 무턱대고 들이대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럼 보호자 분도 놀라게 하고, 강아지 친구도 놀랄지 모르니 아예 원천 차단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매너를 알려줘야 할 텐데, 그런 상황에서는 온통 강아지에게만 관심이 쏠려 내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으니.


그래서 더 빨리 걸어갔다.


그런데 아뿔싸. 호두가 빙글빙글 돌며 주저앉을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푸들 친구가 가까워지고 있는데, 마음이 조급했다. 왜 하필이면 여기서. 조금만 더 가서 구석에서 하면 좋았을걸. 서둘러 배변 봉투를 꺼내고, 호두를 앉히고, 기다리라고 하고, 치우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새 푸들 친구가 바로 옆까지 와있었다. 호두는 튕겨 나듯 훅 일어나 그 친구에게 다가갔고, 보호자 분은 놀라 어서 푸들을 안아 드셨다.


죄송합니다, 놀래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몇 번을 사과드렸다. 그분은 놀란 마음을 안고 어서 자리를 뜨셨다.


친구가 멀어지는 걸 보고 있는 호두를 어서 앉히고, 혼을 냈다. 잠잠 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손이 화끈화끈했다. 푸들 친구에게 가는 걸 제지하느라 줄을 손으로 잡았는데, 훅 쓸리면서 살이 까져 진물이 나오고 있었다. 오른손 중지와 약지 안쪽, 손가락을 힘줘서 쭉 펴는 것 만으로 살이 당기고 아파왔다. 아예 피나는 것보다 진물 나는 게 낫는데 더 오래 걸리고 물만 닿아도 아프던데, 한숨이 푹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걸어서 삼십 분도 더 걸리는데, 그것도 걱정이 됐다. 강아지 한 번 더 만났다간 손가락 안 남아나겠네, 싶어 헛웃음도 피식 났다. 하는 수 없이 왼손으로 리드 줄을 잡고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열심히 조정했다. 돌아오는 길엔 다행히 사람도 강아지도 자전거도 만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손가락에는 진물이 도톰하게 맺혀있었다. 어서 손을 씻고,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당분간 산책은 왼손으로 해야겠다, 더 조심히 다녀야지 싶었다.


지금 그 상처는 옹이처럼 딱지가 앉았다. 진물이 나는 물집에서, 이제는 나무 옹이 같은 딱지. 상처가 꽤 깊이 났는지 아직도 손 씻을 때, 머리 감을 때, 혹은 남자 친구와 손을 잡을 때조차 움찔하게 된다. 딱지 옆으로 진물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상처도 곧 아물 거다. 새로운 자리에 또 언제 생채기가 날지 모른다. 내가 다치는 건 나으면 그만이지만, 둘 다 마음 편한 산책을 다닐 수 있으려면 서로 간의 규칙을 더 잘 만들어둬야겠지. 손이야 나으면 그만이지만, 힘들다고 매번 혼내기만 하는 산책을 하다보면 마음에 물집이 잡힐지도 모르니까.

일단 산책을 많이 나가고 익숙해지는 것, 그래서 자극에 무던해지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는 호기심 대왕 호두에게 매번 새로운 자극인가 보다. 단순히 횟수나 시간을 늘리는 것 말고도, 더 할 수 있는 게 있을지 알아봐야겠다.

(강아지 산책 매너교육이라도 같이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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