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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녜 Apr 19. 2020

일의 고통과 기쁨

스물다섯 번째 한 글자 주제, 일

1.

고등학교 시절, 자주 등장하던 수학 문제 중 길 찾기 문제가 있었다. 대충 네모칸이 여러 개 제시되고, 도착점까지 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하는 문제였다. 내가 늘 사용하는 방법은 각 모서리에 1씩 직접 적어 더하는 방법.

대충 뭐 이런 느낌의 문제들.


딱히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라 내게는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매번 그 방법을 사용하는 나를 보며 친구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공식 하나만 외우면 될 걸 왜 그렇게 노가다를 하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로 가도 답만 맞추면 되지 않냐고. 나는 그 문제를 한 번도 틀린 적은 없지만, 여태까지도 그 친구가 말한 그 공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알려고 하지 않았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2.

대학생 때,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끊임없이 외쳐대는 동아리를 했다. 매주 모여 본인이 분석한 내용을 공유하고, 어떤 전략을 취하는 게 옳거나 효과적인지를 주장하는 활동을 했고, 지난주 내지 지난달의 나보다 나아졌는지를 꾸준히 점검해보는 곳이었다. 때로는 회심의 일격 같은 발표가 나오기도 했고, 때로는 밤을 새 가며 머리를 굴려봐도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한 주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항상 성장에 목말라 있었거나, 성장해야 한다는 압박이 시달렸다.


총 세 학기 활동을 했는데, 첫 학기는 모든 것을 0에서 시작해서 그런지 매주, 혹은 격주간으로는 뭔가 나아지고 있다고 느꼈다. 워딩이 좀 더 매끄러워지거나, 프레젠테이션 화면이 좀 더 예뻐지기도 했고, 구성의 짜임새가 촘촘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두 번째 학기에는 뭔가 달랐다. 가끔은 1학기 보다 못했다고 느꼈고, 때로는 나보다 짧게 활동한 친구보다 모자란 것 같아 속상했다. 그럴 때면 우울감이 밀려왔다. 잘하고 있는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러다 세 번째 학기가 되었다. 두 번째 학기를 나름(?) 말아먹고 나니,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그전까지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이 추상적이었고 어떻게 해도 그 모습에 도달할 수 없었다면, 그 고통을 몇 달 버틴 이후에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내가 이번 학기에 달성하고 싶은 목표를 찾아낼 수 있었달까. 생각해보면 사실 그 세 학기 동안 열심히 외쳐대기만 했던 성장은,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싶은 마음을 사실은 눌러야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의욕만 남발하다 기운을 빼기에 앞서, 방향을 먼저 결정해야 가능했던 거였다. 마치 햇빛이 비치는 방향으로 자라나는 풀들처럼, 뿌리를 키울지 잎을 뻗어낼지 꽃을 피워낼지 순서가 다 다른 식물들처럼.


3.

이제의 나는 오 년 차 직장인. 한번 직장과 직무를 바꾼 걸 새로운 시작이라고 쳐도, 지금의 이 일을 한지 어느덧 삼 년 차다.


첫 번째 직장에서는 원치 않은 직무로 배치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시련에 빠졌더랬다. 내 선택이 아닌 것으로 이렇게 인생의 방향성이 달라지게 되는 건가,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이 직무를 잘 알아볼 생각도 않고 혹시 모를 나와의 케미를 놓치는 게 아닌가 싶어 일단은 열심히 했다. 무엇을 열심히 하는지는 몰랐다. 그저 사무실에서 땀나도록 뛰어다니고, 마주치는 모두에게 열심히 인사를 하고, 목이 쉬도록 전화를 받고, 밤늦게 야근을 했다. 하지만 도무지 이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해 하는 일인지, 이것이 왜 필요한지 납득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닮고 싶은 사람들이 없진 않았지만 그들과 같은 인생을 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어쩌면 배치를 받는 그 순간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이유 없는 거부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길 찾기 문제를 풀 때의 마음처럼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 내게 맞는 부분을 사실은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내 괴로웠을지 모른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돌아봐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몇 년 전의 나는 그렇게 그곳을 떠났다. 다행인 건 그곳을 떠나 후회하는 마음은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는 것뿐. 슬픈 건 그때 그 시절을 괴로워만 하면서 보냈다는 것.


4.

지금의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다시는 후회하지 말자고. 어떻게든 적응해보자고. 어떤 유형의 일을 내가 좋아하는지 고민해서 잘 골라온 곳이니 잘해보자고.


이 곳에서의 첫해는 마치 대학교 동아리에서의 첫 학기 같았다. 모르는 것이 많았고, 손을 뻗으면 어디에나 배울 것이 있었다. 하나둘씩 내 것으로 지식과 스킬을 흡수해나가며 성장한다고 느꼈다. 실수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직 처음 해보는 일이니까, 얼른 해결하고 다음에 다시 실수하지 않으면 되지,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두 번째 해는 뭔가 달랐다. 손을 뻗으면 닿는 것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거나 알아야 하지만 헷갈리는 것들이었다. 내가 더 나아지고 있는지, 첫 해보다 좋은 일꾼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일이 손에 익어 속도는 빨라졌지만 많은 일들을 빠르게 쳐내는데 집중하느라 그 모든 내용을 오롯이 기억하거나 이해하지는 못하는 경우도 왕왕 발생했다. 크게 괘념치 않고 그저 오늘의 일을 묵묵히 하다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갑자기 물어보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분명 만족스럽고 재미있는 일이라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이게 내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 세뇌를 해둔 것은 아닐지 문득 걱정이 됐다.


이 와중에 위안이 되는 것은 함께 일하는 이들이 가볍게나마 던지는 “당신이 있어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일은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는 슬로건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사실은 기쁠 수 없는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일이 막힐 때는 왜 내가 이것밖에 못하는지, 혹은 잘 될 때도 지금의 나로 충분한지를 계속 반추하게 하는, 고통이 핵심인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고통 속에서도 나를 계속 일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내게 일터에서의 가장 큰 기쁨은 내가 필요한 존재라고 느껴지는 것. 따지고 보면 이 세상 일에 내가 아니면 안 될 일이 무엇이 있겠냐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일하는 게 즐겁다고, 당신이 해주는 일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그 말이 듣고 싶어서, 혹은 그 느낌을 받고 싶어서 계속 일을 하게 된다. 그것도 열심히.


때로는 절박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짜증도 나지만, 직장인으로서의 다섯 번째 해는 부디 내가 원하는 성장의 길을 찾아내길. 그래서 자신 있게 스스로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게 되길. 다시 한번 다짐하고 바라본다.


내일은 기나긴 재택근무를 마치고 오랜만에 회사에 나가는 날. 내게 필요한 이들에게 나도 필요한 이가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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