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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녕 Sep 03. 2022

제 차례는 언제입니까

불펜투수를 보면서

야구 경기의 절반인 5이닝이 시작되면 경기장 한쪽에 있는 ‘불펜(Bull Pen)’을 흘끗 쳐다본다. 불펜은 선발 투수 다음에 등판하는 투수가 출전 준비를 하며 몸을 푸는 곳이다. 베란다처럼 길쭉한 직사각형 공간은 경기장과 같은 흙바닥이 깔려 있고 선수들은 그 안에서 가볍게 달리고 스트레칭도 하고 결정적으로 포수와 공을 주고받는 피칭을 한다. 감독과 코치는 경기가 이기고 지는 상황을 따져보며 팀의 전술에 맞는 다음 투수를 결정한다. 코치는 잔뜩 단호한 표정으로 아파트 가정집의 인터폰처럼 생긴 수화기를 집어 들어 불펜에 연락한다. 그 순간 불펜 한쪽 공간에 나란히 앉은 투수들은 고개를 내 이름이 불리지 않을까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마침내 6이닝까지 끝나고 7이닝, 한 명의 선수가 불펜을 나와 그라운드의 투수 자리로 향한다. 경기의 또 다른 챕터가 열리는 순간이다.


선발 투수를 보면 가슴이 웅장해지며 우리 팀의 에이스라는 자부심이 뿜뿜 하지만, 불펜 투수에게는 애틋한 마음이 있다. 선발투수가 스트라이크존에 공을 못 던지거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면 답답하겠지만 이들이 못하면 화보단 짠 내가 난다. 오직 다섯 자리뿐인 선발 투수의 경쟁에서 밀렸다는 2인자의 포지션, 경기하는 동안 한없이 기다리다 마침내 감독의 선택으로 마운드에 오른다는 서사가 있기 때문일까. 잘했으면,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경기에 출전하기 바라며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이 가끔은 나의 일상과 닮았다. 요즘은 브런치나 인스타그램에 본격적으로 글을 올리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썼던 일기장에 ‘글을 써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라는 꿈을 적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일기장을 펼쳐 그 문장을 마주한 순간, 그동안 현실적인 이유나 핑계를 들며 이 꿈을 미뤄왔는가를 깨달았다. 이제는 이 꿈을 바래 왔던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싶다. 가만히 기회를 엿보기보다 준비된 기다림을 만들어본다.


매일 한 줄이라도 꾸준히 글을 쓰고 책을 읽으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과 최고의 방법이다. 꾸준한 성실함을 부리며 다른 사람들의 브런치에 들어가 하루에 한 번은 한 편씩 읽고 기분 좋은 댓글도 남긴다. 서점에 종종 들르며 요즘 나오는 책의 흐름도 파악하고 최신 트렌드도 쏙쏙 담아야 한다. 그러다 언젠가 화려한 조명이 날 감싸는 하이라이트 조명이 비추면 적극적으로 나가서 스탠딩 코미디쇼처럼 소소한 활약을 펼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MBTI의 ‘J’인 내가 생각한 완벽한 계획표이다. 꾸준히만 하면 될 텐데.


야구는 그 해의 시즌 개막을 앞두고 2월 말이 되면 대부분은 본인이 맡을 역할이 정해진다. 중간에 나오는 불펜 투수라도 경기가 이길 때 나오는 필승조, 지고 있을 때 나오는 패전조가 있다. 경기 상황을 얼추 보면 내가 나가겠다 싶은 타이밍을 안다.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기다림이다.


셀프로 임무가 주어지는 서녕의 삶은 약간 다르다. 이제 막 책의 세상에 데뷔했고 당연히 내 글을 읽는 사람 보다 읽지 않는 사람이 많고, 아마 평생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에 널리 널리 퍼져 누군가의 마음속에 안심 배송하길 바라겠지만 외면받는다는 결과도 받아들여야 한다. 기다려야 하고 있다. 돌이켜보니 아직 책도 세상에 안 나왔는데 이런 배부른 소리를 한다.


그 기다림 속에서 바짝 마르다 단단한 망부석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인내심이 부족한 내가 기다림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 함께 글 쓰는 사람들이 책을 출간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동료가 결혼한다는 이야기, 고등학교 친구가 건강하게 출산한 아이가 어느새 백일이 지났다는 이야기. 모두가 각자의 무대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구나.


내 차례는 언제쯤 찾아올까. 내 삶과 나 스스로가 변변치 않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고 내 글이 공감받으며 삶의 재미를 얻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 ‘꽃’의 한 구절처럼 나는 ‘무엇’이 되고 싶고,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은 의미가 되고 싶다.


오늘도 야구 경기장을 찾았다. 5이닝이 지나갈 때쯤 불펜에서 공을 던지면서 몸을 풀고 있는 투수들을 본다. 몇십 개의 공을 던지며 몸을 풀고 있지만 막상 경기에 나가지 못할지도 모르는 간절함을 본다. 준비한 만큼 잘 보여주길 바라는 은근한 응원을 보낸다. 투수와 나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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