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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녕 Nov 30. 2022

해열과 잔해: 올 한 해를 불태웠습니다

하얗게 다 버린 정글에 홀로 남은 하얀 호랑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정글의 왕이라는 기세만큼은 여전한 분위기,

구두와 연석, 빨간 꽃들과 침팬지... 어울리지 않은 존재가 뒤엉킨 어느 세기말의 현장


에픽하이의 랩퍼 '타블로'의 솔로 앨범 '열꽃'의 커버이다. 에픽하이와 타블로의 음악은 내 10대의 곳곳을 수놓았다. 앨범을 발표하기 전까지 그는 개인적인 신상에 대악플과 언론의 부추김이라는 방식으로 마녀사냥을 당했다. 인간 이선웅(타블로의 본명) 개인의 삶을 고통스러울지라도 역설적이게 이 앨범은 이 사건들로 인해 더 빛이 났다. 물론 기본적으로 음악이 좋았으니까 서사가 더해 최고의 앨범이 되었겠지.


택배 상자에서 그의 앨범을 꺼냈을 때 다 타버린 그의 심장을 들고 있는 것 만 같았다. '하얗게 불태웠다'가 물성을 갖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폐허가 되어버린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오늘 오후 두 시, 아직 한창 근무 시간인 평일 낮에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2호선 강남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이 앨범 표지가 다시 생각났다. 하얗게, 새하얗게 타버린 상태, 요즘의 '나'다.


지난 주 이사까지 끝내고 개인적인 일정이 마무리 되었다. 늦가을 비가 슬쩍 얼굴만 비치고 강추위가 덜컥 새치기로 끼여 들었다. 열이 나고 목이 아프고, 침대 머리맡에는 코 푼 휴지가 한 무더기 쌓였다. 집과 병원에서 코를 세 번이나 찔렀지만(정확히 한번의 검사당 20회였으니 자그마치 60번이다) 음성이 나왔다. 감기든 요즘 유행하는 독감이든 내 몸이 더이상 움직이지 못한다며 흰 수건을 던진다.


To do list에 체크하지 못한 일이 아직 남았다면 몸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래도 내 면역력이 눈치껏  주요 일정을 얼추 끝내고 뻗어주었다. 마음은 편하고, 몸이 고통스러울 뿐이다.


24시간 꺼지지 않던 불이 몇 개의 알약으로 내려간다. 아이러니하다. 글을 쓰고 책을 내며 이사까지 한다고 장작을 넣었다가 이제는 약국에서 '해열제'를 찾는다. 약은 잔해만 남은 몸 깊숙히 파고 든다. 소화전에 있는 호스를 품에 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비며 물을 뿌린다. 열이 차츰 내린다.


다시 원점으로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나누고 싶은 말들이 많다. 뇌에서만 웅얼웅얼하다가 코를 한번 탱 풀고 기침을 하면 초성과 모음들로 흩어져버린다. 비염약도 필요하다. 당분간 몸과 마음을 복구하는 시간이다.


명동에 있는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연말 기념 화려한 미디어 파사드를 곧 오픈한다고 한다. 경기가 어려울 수록 사람들은 화려한 것을 찾는다는 드라마 '미스코리아'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IMF로 한국 경제가 침체를 겪던 시절 그 해의 미스코리아 진이 된 주인공은 색깔이 강렬한 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정신을 차리니 화려함이 다르게 보인다. 이럴 수록 팍팍한 내 삶의 중심으로 돌아가 내실을 다져야 한다. 크고 반짝임에 눈이 멀지 않도록 건강해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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