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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녕 Aug 21. 2022

양파, 당근, 호박이 냉장고에 있는 삶

오전 근무 시간을 광고주와 쉴 틈 없이 메신저로 불태우고 드디어, 점심시간이다. 지쳤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냉장고를 열었는데 마땅히 먹을 만한 반찬이 없었다. 아침에 우유 대용으로 마시는 아몬드 브리즈, 엄마가 시골장에서 샀다며 보내준 미숫가루, 반찬통의 삼분의 일 정도 남은 김치, 다진 마늘 정도가 보였다. 보통 일요일에 식단을 짜고 이마트 쓱 배송시키는데, 최근 회사 일이 바쁘다 보니 미리 장 보는 시기를 놓쳐버렸다. 냉장고 속 재료와 실온에 보관한 카레, 현미 쌀까지 후보에 올려 각 조합으로 만들 수 있는 요리를 떠올려보았다. 맨 현미밥에 진한 바몬드카레 비벼 먹기, 아몬드 브리즈에 미숫가루 섞어 먹기 등 든든한 점심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나도 우리 집 고양이 살구처럼 언제나 한 가지 사료만 먹는 소나무 입맛이라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매 끼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입맛이 날 귀찮게 한다. 집 한쪽에 굴러다니는 옷으로 주섬주섬 갈아입고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양파나 당근, 애호박 같은 기본템을 머릿속 장보기 리스트에 올려놓았다.


양파, 당근, 애호박은 한국 밥상 재료 탑 쓰리(Top 3)이다. 어느 요리에 넣어도 잘 어울리고 식감과 맛이 풍성해지는 덕분에 영화로 치면 ‘명품 조연’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단독으로 주연을 맡은 반찬 장르에서도 뛰어난 존재감을 톡톡히 한다. 고기나 생선의 곁들임으로 좋은 양파장아찌, 샌드위치 속이나 샐러드로 많이 들어가는 상큼한 당근 라페 그리고 새우, 다진 마늘과 함께 볶은 애호박나물까지… 초호화 라인업이다. 최근에 애호박 가격이 두 배 정도 오르며 가끔 빠질 때가 있지만 그래도 이 녀석들은 나의 밥상에서 씩씩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냉장고 채소 칸에 든든히 자리한 삼총사를 바라보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 잘 살고 있구나’ 어디선가 칭찬이 들려온다. 끼니를 즉석이나 배달 음식으로 때우지 않고 건강한 한식을 먹었다는 훌륭한 증거이다. 몇 년 전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난 후 냉장고 속 아이템을 자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영화 속 주인공은 편의점 알바를 하며 폐기된 삼각김밥으로 때우거나 원룸에서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는데 그 장면이 거울을 보는 듯 불편하고 안쓰러웠다. 편의점 삼각김밥, 컵라면, 레토르트 음식까지 나도 편하다는 핑계로 많이 먹었다. 회사에서 에너지를 다 써버렸으니 메뉴를 고민하고,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까지 만들어낼 여유가 없다.


작년 건강검진에서 이렇게 끼니를 ‘때운다.’ ’ 보면 일할 수 있는 건강한 몸도 사라질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건강하고 먹고 운동하라는 의사의 뻔한 대사가 진심으로 심장에 콕 박혔다. 대학 때 여섯 살 많던 선배 언니가 하던 말이 정말이었구나. ‘서녕아, 삼각김밥으로 끼니 때우면 골로 가’ 건강검진 결과표를 질끈 반 접고 서랍 제일 안쪽으로 쑤셔서 넣었다. 이마트몰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비비고 곰탕, 오뚜기밥, 밀키트의 X자 버튼을 누르고 양파, 당근, 애호박을 담았다. 한번 씻어 놓은 깨끗한 상태가 아닌 흙 묻은 제품 그대로.


슈퍼마켓에서 집으로 돌아와 도마를 펼쳤다. 싱크대의 물을 틀어 당근의 흙을 씻어내고 양파의 껍질을 깐다. 애호박은 저녁 식사 몫으로 남겨 둔다. 오전에 바쁘게 일하느라 지친 날은 뜨거운 불 앞에서 지지고 볶고 싶지 않다. 같이 데려온 양상추도 먹기 좋게 썰어 한 그릇에 담았다.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만 살짝 뿌리면 샐러드를 완성한다. 아몬드 브리즈를 유리컵에 담아 샐러드 보울 옆에 놓았다. 앞으로도 이런 건강한 점심을 먹고 싶다. 양파, 당근, 애호박을 사고 손질하는 여유가 있기를 소망한다. 뉴스에서 지구 온난화로 가뭄이 심해져 농작물이 말라 죽었다고 말한다. 만약에 양파, 당근, 애호박이 이 세상에 사라진다면 무엇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삼 총사가 내 건강을 지키는 만큼 나도 이들을 무엇으로 지킬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점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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