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녕 Aug 17. 2022

금세 스며드는 리트머스 종이처럼

나는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을 닮는 버릇이 있다. 친구가 세상 전부였던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이 귀여운 버릇은 시작되었다. 열다섯 살 때 팔짱을 끼고 다녔던 정연이는 집중하면 복숭아처럼 양 볼이 붉게 물드는 친구였다. 중간고사 마지막 4교시가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나보다 뒷자리에 앉은 정연이를 찾아갔다. 정연이의 볼은 막 한증막에서 나온 듯 평소보다 더 빨갛게 물들었고, 정연이는 두껍게 쌓인 지우개 가루를 책상 밖으로 쓱쓱 털어내고 있었다. 나도 정연이의 볼에 금세 물들며 과학에서 시험 범위에 없는 문제가 나왔다며 투덜거렸다. 나는 체육 시간 체력장으로 오래달리기 할 때를 제외하면 얼굴이 쉬이 붉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느새 빨개진 두 뺨을 바라보며 내 얼굴이 과학 시간에 실험할 때 사용하던 리트머스 종이 같다고 생각했다. 파란색 용액이 담긴 비커에 살짝 담그자마자 금세 중력을 거스르며 액체가 타고 올라오던 리트머스 종이처럼.


그 때는 나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친구에게 자연스럽게 물들었던 시절이었다. 훗날 읽었던 청소년기에 관한 글에서는 당시의 내 행동이 학술적으로 ‘Peer Pressure(또래 압력)’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친구들의 무리에 끼지 못하면 뒤처지는 불안함에 결국은 친구를 따라간다는 현상이라고 했다. 다들 이런 겪는구나 살짝 안도했다.


스무 살 이후로는 어린 시절만큼 친구의 어떤 모습을 닮거나 갖고 싶지 않아졌다. 친구가 반짝거릴수록 나의 어둠이 선명하게 보였고 내가 더 눈부셔야 한다며 친구를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경쟁을 부추기는 세계의 열기에 지쳐가며나의 리트머스 시험지는 다른 색으로 물들 여유가 없었다. 무엇이 와도 흡수하지 않도록.


십 여년의 시간이 흐르고 최근의 나는 용기를 내어 타인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지금 가장 가깝게 지내고 있는 애인 K의 영향이다. K와 연인이 되고 나서 물건을 살 때 꼼꼼히 찾아보고 따져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전에는 기분이 안 좋으면 비싸더라도 맛있는 저녁을 자주 보상했고, 가격보다 그럴듯한 브랜드 스토리를 생각하며 개인 디자이너의 옷을 사곤 했다. 글자 대로만 읽으면 경제 개념 없는 철없는 아이였지만 이런 면이 광고회사에서 일하기에 나름의 장점도 있었다. 반짝거림에 현혹당하는 소비자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가장 예쁘고 멋진 것을 구별하는 눈이 있으니까. 그래서 광고와 내 삶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는 현실을 자주 잊어버렸다.


「힙스터 느낌의 모델이 제주도에서 친구들과 야간 캠핑을 하며 출고가 백 만 원짜리 최고급 플래그쉽 스마트폰으로 추억을 남긴다.」


어느 스마트폰 광고에 기록된 이 장면은 내 손에서 나왔다. 나의 현실은 고가의 캠핑 장비 세트를 갖추고 제주도를 여행 가는 여유나 심지어 당시에는 운전면허증도 없었다. 회사에서는 눈에 확 띄는 멋지고 힙한 모델을 후보로 고르고 많은 이들의 인스타그램 피드 한 켠을 장식했을 여행지를 촬영 장소로 선택한다. 촬영 당일은 사람과 장소 모두를 최고의 상태로 갈고 닦아 한 장의 이미지, 한 편의 영상에 담아냈다. 쏟아지는 일에 파묻히고 광고 속 완벽히 가공된 반짝거림에서 살수록 나의 지갑은 얇아졌다. 물론 모든 광고인이 나와 같은 마음은 당연히 아니지만, 당시에 나는 광고와 현실 사이에 비꺽거리는 시소를 타며 적절한 균형을 찾지 못했다.


이 와중에 K와 사귀게 되었다. D+30일도 채 되지 않았던 날 그는 내 소비 습관을 바라보며 찬물을 끼얹었다. 그의 말에서 쓴 맛이 나서 일곱살 때 엄마 몰래 버리던 한약이 생각났다. 나도 다 큰 성인이고, 내돈내산으로 정당하게 구입했는데 왜 나를 혼내지. 이 물건의 감성을 이해하면 이 정도 가격만큼 낼 만한데. 그의 말도 한약처럼 몰래 어디론가 숨겨버렸다. 내 선택이 틀렸다고 빨간 줄을 막 긋는 그의 모습에선 사랑이란 감정은 잠시 비껴있었다. 그는 조언을 건냈을 뿐인데 나는 거절당했다는 마음에 씩씩 거렸다.


K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비습관은 십 년 이상 똑같았으니 쉽게 바뀔리가 없었다. 차피 지갑은 각자의 것이니까 라는 마음으로 그를 만났다. 스마트폰에 설정한 디데이 계산기가 D+100에 가까워질 무렵 그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일렁였다. 열다섯, 친구처럼 쉽게 붉어지곤 했던 리트머스 종이의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옷 하나를 골라도 재질과 리뷰를 꼼꼼히 살펴보고 스마트폰을 바꿀 때면 그 제품 광고를 만들던 나만큼 기능과 스펙을 술술 이야기했다. 나라면 ‘어머 저건 당장 사야 해’라며 어느새 손에 쥐고 있을 텐데 그 친구는 아직도 장바구니에 담긴 1번과 2번 중에 고르고 있었다. 선택을 앞에 두고 조급하지 않은 그의 모습이 반짝거렸다. 광고 속 예쁜 이미지에 끌려 온라인 마켓이 떠먹여 주는 결제창에 승인했던 나, 최선이었을까.


하루에도 여러 번 은행 앱을 접속해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내 생각보다 앞 자리가 많이 적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 계약기간이 올해 끝나면 여건이 더 나은 집으로 이사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병원비가 많이 필요한 살구라는 부양가족도 눈에 들어왔다. 어디엔가 숨겨두던 K의 조언을 주섬주섬 잘 꺼냈다. 내가 살아왔던 방식과 다르더라도 그는 나를 위해 적절한 조언을 해주었으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카페에 가는 이용 횟수를 줄이고, 가능한 회사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식비를 줄이는 소소한 실천 계획을 세웠다.


친구의 볼 마저 따라 물들었던 잔망스러운 버릇을 다시 키워보려고 한다. 시덥지 않은 농담을 하며 나를 편안하게 하는 유쾌한 모습, 부정적인 감정에서 금방 빠져나와 미래의 즐거움을 향해 노를 젓는 단단한 마음. 내 곁에 있는 K의 좋은 면을 나의 한 조각으로 만들어야지. 마음속의 열등감과 적대감을 걷어내고, 금세 스며드는 리트머스 종이처럼.

작가의 이전글 능소화가 핀 걸 보니 여름이잖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