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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녕 Jul 25. 2022

능소화가 핀 걸 보니 여름이잖아요

Dedicated to 능소화

 진초록의 잎들이 콘크리트 벽을 와락 감싸 안고 붉은 능소화 꽃들이 팔랑팔랑 긴 줄기에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주 일요일 동네를 산책하다 마주한 풍경, 정말 여름이 왔다. 바야흐로 2016년 여름 즈음 SNS를 둘러보다 한예리 배우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최악의 하루’ 포스터를 우연히 보았다. 벽돌담장에 다홍빛 능소화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배경으로 한예리 배우는 아주 커다란 풍선껌을 불고 있었다. 초록 풀다홍빛 꽃, 불투명한 풍선껌, 빛나는 배우. 여름의 선명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영화 '최악의 하루' 포스터

 알면 보이는 것이 많아진다고 그 후로 거리를 걷다가 이 꽃을 여러 번 마주쳤다. 지하철 6호선의 끝자락 당고개역 부근에 가면 예전 경춘선 철로를 따라 길게 늘어뜨려진 ‘경춘숲공원’이 있다. 그 공원의 한 곁에도 능소화 담장이 있다. 더운 숨을 뿜어내던 어느 여름 날, 담벼락에 찰싹 붙어 포스터와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었다. 꽃들이 탐스럽게 무리 지어 있었고 바라볼 때마다 마음 속에 흘린 땀 만큼 꽃이 한 움큼이 가득 채워졌다. 이로써 유희열의 ‘여름날’, 햇살에 반사되는 초록잎, 시원한 여름밤의 생맥주 그리고 능소화까지 더운 여름에 툴툴거리지 않을 이유가 늘어났다.


 올 해는 유독 숙제를 푸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방바닥의 머리카락, 캣타워에 덕지덕지 박힌 살구의 털, 매달 날아오는 고지서와 월급 명세서에 빼곡히 적힌 세금들 그리고 새로운 정부는 어떤 주택 정책을 시행하는지… 매일 여덟 시간 이상 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지만 챙겨야 하는 일이 많다. 예전에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기운을 충전하던 출퇴근길이 이제는 장바구니에 담아둔 생필품을 구매하느라 바쁘다. 


 한 때는 내 앞에 놓인 문제를 보고 설레며 두근거리기도 했었다. 수능 입시를 준비하던 고등학교 때, 문제집 한 권을 다 풀어내던 희열로 공부를 했다. 이 세상에 모든 수능 문제를 내가 다 해결한다는 마음으로 '문제'는 환영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수능을 치르고 바로 다음 날 학교 소각장에 세워진 큰 트럭에 문제집들을 집어 던지며 속 시원히 이별을 했다. '만나서 반가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좋은 마음으로 보내줬는데, 시간이 지나고 그 문제집이 환생을 했는지 다시 찾아왔다.


 잠들기 전 스마트폰으로 알람을 맞추면 지금부터 몇 시간 몇 분을 잘 수 있는지 메세지가 뜬다. 턱없이 부족한 수면 시간 앞에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풀어도 풀어도 계속 나오는 숙제 같을 삶을 왜 살아야 하는가.' 대학교 2학년 때 ‘서양철학사’ 교양 수업에서 들었던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를 떠올려 본다. 백지 답안지를 빼곡히 채우며 잘 풀었던 문제들이 이제 기투와 피투, 실존 몇 개의 퍽퍽한 키워드로만 남아있다. 철학을 배웠지만 나의 피부에는 영 와 닿지가 않다. 


 며칠 전 만난 능소화를 떠올린다.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그 날의 분위기를 헤아려 본다. 그저 걷기만 해도 주어지는 선명한 아름다움, 거창한 철학 이론보다 사소한 그 풍경이 내가 살아있다고 말해준다. 머릿 속을 꽉 채운 투 두 리스트(To-do list) 대신 눈과 코, 입, 손이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누군가의 가족이나 어떤 회사의 직원이라는 역할이 아니라 그저 이 지구, 지금의 계절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여름의 아름다움을 느끼면 정말 ‘살맛’이 난다.


며칠 전 동네 산책을 하다 만난 능소화 담벼락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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