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녕 Jan 14. 2023

1. 손정승 - 아무튼 드럼



나의 방 한구석에는 종로 낙원상가에서 23만 원을 주고 데려온 덱스터 통기타가 있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어느덧 열두 살을 먹었다. 대학을 입학하고 공식적인 동아리 회원 가입 기간이 시작하기도 전에 학생회관의 통기타 동아리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한 학번 높은 동아리의 회장과 부회장 선배들은 스스로 찾아온 나를 보며 신기해하며 어떤 가수나 음악을 좋아하는지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동아리방에 울려 퍼지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보편적인 노래’를 듣는 순간 서울에 온 이유를 찾아버렸다. 브로콜리 너마저는 2007년 첫 앨범을 냈고 인디계에서는 유명했지만 인디 음악에 관심이 없던 사람에게는 생소한 밴드였다. 마침내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는 사람이 생겼고, 게다가 한곳에 모여있다. 사탕과 초콜릿, 과자가 잔뜩 포장된 ‘종합 과자 선물 세트’를 받은 기분이었다. 동방에는 낭만이 있었다. 얼마 전 유튜브를 보다 알게 된 노래를 슬쩍 나누면 다들 앞다투어 각자의 취향을 꺼냈다. 그리고 그 노래를 즉석에서 연주하고 부르며 공강 시간을 보냈다.


낭만적인 시간을 유지하려면 기타를 연주할 수 있어야 했다. 부모님이 매달 부쳐준 용돈을 모아 학교 근처의 기타 학원을 한 학기 동안 다녔다. 항상 연주하기 전과 후에 기타 선생님은 크로매틱을 시켰다. 크로매틱은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을 기타의 프렛(지판)에 하나씩 올려 손가락을 푸는 기초 연습이다. 피아노로 치면 건반을 하나하나 누르며 손가락을 푸는 하농, 드럼이라면 고무로 만든 동그란 드럼 패드를 치는 일이다.


저자 정승님이 드럼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레슨 선생님을 찾고 꾸준히 연습하며 한 곡 씩 클리어하는 과정이 미니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책을 읽는 내내 기타를 배우던 스무 살의 봄이 떠올랐다. 악보를 읽는 법을 배우고 기타의 구석구석의 이름을 알며 때로는 하루에 열 시간 동안 붙어있으며 진득히 친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승님처럼 더 진득하게 나아가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초보 딱지를 떼고 ‘어느 정도 칠 수 있다’는 말을 들을 때쯤 다시 학원에 등록했다. 처음 배웠던 곳보다 전문적인 커리큘럼으로 가르치는 곳이었다.


존 메이어의 ‘Stop This Train’, 토마스 쿡의 ‘솔직하게’ 같은 화려한 곡을 치고 싶었다. 그것도 동아리 정기 공연 무대 위에서 선 채로 멋지게 보여주고 싶었다. 새로운 기타 선생님은 기타 한 개의 프렛에 여섯 개의 줄이 붙은 기타의 각 계이름을 외우는 과제를 내주었다. 기타는 피아노 건반처럼 형태로 쉽게 계이름을 구분하기 쉬운 악기는 아니었다. 하나의 프렛에만 계이름이 6개인데, 최소 열 개의 프렛 - 60개의 계이름을 외우는 일이 지겹고 어려워서 포기했다. 3도, 5도 화음을 배우는데 수학 공부를 하는 것 같아 오선지 노트를 덮었다. 즐겁게 노래를 들을 때는 연주의 수고스러움이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좋았던 구절 중의 하나가 ‘본업이 아닌 자의 자유’를 맘껏 느낄 수 있기에 부담을 덜자는 저자와 이슬아 작가의 대화였다. 계이름도 외우고 박자도 맞아야 하지만 나는 생활 음악인이니까 엄격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 내면에 집중하며 내 안의 흥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저자 정승님은 나의 오랜 고등학교 친구이다. 우리는 일 년 동안 같은 반이었고 나란히 앉는 짝꿍이었다. 사실 고등학교 3년 내내 입시 공부에만 파묻혀 사느라 공부 외 일상 기억이 정말 많지 않다. 눈을 뜰 땐 학교에서 문제집을 풀었고 눈을 감을 땐 학교 옆 기숙사 2층 침대에 누워 있었다. 문제로 가득한 내 고등학교 생활 중 정승이가 있는 한 줄의 필름이 있다. 발랄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쉬는 시간의 교실, 좋아하는 음악을 이어폰으로 나눠 듣던 기억이 있다. 드럼을 배운다는 일상은 만날 때마다 종종 들었고,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연습 영상도 피드에 자주 보았다.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언젠가 먼저 이야기해주었다. ‘책’의 세계와 서점 밖에서 만들어낸 비트의 세계가 교차하여 ‘아무튼 드럼’이라는 결실이 생겼다. 가까운 누군가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 이런 마음일까. 남보다는 훨씬 많이 알지만 그래도 각자 먹고 사느라 생각을 속속들이 공유하지는 못한다. 오랜만에 만나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서녕, 나 드럼 치면서 이렇게 살았어’라고.


다시 한번 우리가 함께 있던 학교의 교실이 떠오른다. 나는 문제집에 고개를 푹 박고 오른손은 연필을 꽉 쥐고 있다. 정승이가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꺄르르 웃는다. 웃음의 이유를 알고 싶지만 다시 고개를 책상으로 돌렸다. 간절히 나누고 싶었다. 좋아하는 친구의 소중한 기쁨과 슬픔,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알고 싶었다.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던 이런 날들이 떠오른다. 이 책을 읽으니 당시에 남겨둔 아쉬움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된다. 시원한 여름, 우리는 학교 등나무 계단에 나란히 앉아 쌍쌍바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고 있다.


아무튼 드럼과 고양이 살구


*'아무튼 드럼'은 알라딘 온라인 서점에서 데려왔습니다.

*9회말 책아웃은 2023년에 꾸준히 연재하는 저만의 책 읽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편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또는 송길영의 '그냥 하지 말라 당신의 모든 것이 메세지다'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