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녕 Jan 28. 2023

2.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아니 에르노 - 단순한 열정, 박찬욱 감독 - 헤어질 결심


감히 그녀의 말을 단순한 열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책의 화자는 개인의 생활조차도 애인을 생각하는 일에 향해 있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길을 걷거나 어떤 단어를 들을 때도 그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이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 그녀의 머릿속을 하나의 카메라 렌즈라고 가정한다면 갤러리에는 오직 그와 관련된 사진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도 말하듯 ‘한 남자와 미친 듯한 사랑’을 하고 집착처럼 보이는 것은 그와의 특별한 관계 때문일 것이다.


‘불륜’


 그녀는 부인이 있는 남자와 만나고 있었다. 그는 업무차 프랑스 파리에서 잠시 머물렀고 그사이에 그녀를 만났다. 부인이 다른 나라에 있지만 만남은 조심스러웠다. 책 속에 열거된 에피소드가 그들 사이의 전부라면 여타 다른 연인들처럼 공원을 산책하거나 파리의 길거리에 있는 낭만적인 카페에서 커피조차 마신 일이 없다. 오로지 그녀의 집에서 정해지지 않는 시간에 불쑥 만났다. 그녀는 기약 없이 그를 기다리는 동안 텅 비어 있는 타임라인을 그와의 기억으로 촘촘히 새겨 넣은 것이다. 그런 행위가 그녀에게 이 관계를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테니까.


 유부남과 관계를 맺는데 윤리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녀의 욕망, 치밀한 성적 욕망을 오롯이 드러내며 그녀가 할 수 있는 가능 범위에서 열렬히 애정을 표현한다. 직진뿐인 그 태도가 ‘단순한’ 열정이라는 것일까. 어쨌든 이 책은 남의 일기장을 훔쳐본 듯 얼굴이 확 달아오르게 만든다.


 누군가를 사랑해본 경험이 있다면 그녀의 태도를 쉽게 ‘집착’이라고 정의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물론 불륜은 절대 하면 안 된다.) 나는 이따금씩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한 기억을 따라 찾으며 상상으로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서가를 뒤지듯이 차분하지만 설레는 발걸음으로. 당시의 풍경, 특이했던 후각이나 촉각,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는 소설 ‘어린왕자’ 와 똑같은 마음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하면 역부터 그날의 동선을 생각하며 어색하지 않으려고 미리 걸어봤던 길. 상대방이 지하철이 늦게 도착해서 십 분 정도 늦는다고 연락이 오면 부풀었던 마음에서 공기가 20퍼센트 정도 빠져 살짝 가라앉히고, 마침내 만나는 순간 눈을 마주치며 웃어보는 그 표정들. ‘사랑’이란 이름으로 움직였던 날들이다.



 오로지 내면을 고백하고 탐색하는, 아니 ‘탐닉’에 가까운 종류의 글은 오랜만에 읽는다. 읽을 때마다 주인공처럼 나의 내면을 고요히 탐험하게 된다. 마침 책을 읽기 전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본 터라 사랑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영화의 여주인공 ‘서래’ (탕웨이)는 남주인공 ‘해준’(박해일)을 사랑한다. 서래는 살인 사건의 피의자이자 죽임을 당한 사람의 아내이고, 해준은 그녀를 조사하는 형사의 관계이다. 두 사람 모두 결혼을 한 유부녀/남이다. 하지만 서래는 이런 관계는 생각해보지 않는 듯 무작정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해준은 느끼지 못했지만 사실 이상해 보이던 그녀의 모든 행위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모르는 언어로 표현했을 뿐 요약하자면 ‘사랑’이란 감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30년 넘게 살면서 다양한 종류의 사랑의 언어를 경험해보았다고 믿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툴툴거리는 것, 고양이가 아침에 나를 깨우는 것, 친구의 조언과 격려 때로는 비판이나 비난, 따스한 포옹 같은 행위 말이다. 나의 표현법은 애정의 대상에게 무엇이라도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더 해주는 일이었다. 출근길에 마시는 카페라뗴, 퇴근 후 먹는 치킨, 고향을 다녀와서 챙겨오는 소소한 선물들… 그런 일들이 ‘너를 좋아한다’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런 내 방식이 타인도 동일하지 않지 않고, 때론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정말로 ‘헤어질 결심’을 하고 이별을 코앞에 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한 번도 장문의 메시지를 보낸 적이 없는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내내 구구절절 써 내려간 글에 마음이 동하고 말았다. 나와 표현법이 달랐을 뿐 결국은 같은 말을 하고 있었구나.


당장의 미움과 더 나아가 분노를 끄고 ‘단순한 열정’의 자세로 바라본다. 내가 소소하게 보냈던 일상을 비집고 나면 저기 지하철 출구의 한 귀퉁이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출구에서 목적지까지의 경로만을 탐색하느라 진심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타인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자는 다짐을 해본다.


*'단순한 열정'은 성북구 동선동의 서점 부비프에서 데려왔습니다.

*9회말 책아웃은 2023년에 꾸준히 연재하는 저만의 책 읽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편은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문장들


P.13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 외에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P.15 일단 화장을 하고 머리 손질을 하고 집 안 정리를 끝내고 나면, 설령 시간이 남는다 해도 원고를 고친다거나 책을 읽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A를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일에 조금이라도 정신을 빼앗겨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P. 67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1. 손정승 - 아무튼 드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