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곡성>: 그래도 인간은 살아간다

by Sonia Kil


이렇게 소문이 파다한 건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거여.


영화 <곡성>의 서사는 의심을 통해 발화된다. 의심의 전제는 의도하지 않은 고통에 속수무책인 인간의 나약함이며, 그렇기에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는 인간의 의심은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곡성>은 전라남도 곡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영화에서는 곡성이라는 지역 자체보다는 "인구가 많지 않고 외부인에 배타적이며 토속신앙이 존재하는 소도시"라는 공간적 특수성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곡하는 소리"이며 동시에 곡성군을 연상시키는 이 제목처럼, 영화에는 수많은 맥거핀적 장치와 종교적 알레고리가 등장하며, 어떤 점에서 <곡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맥거핀 덩어리인 듯 보인다. A 뒤에 숨어있는 듯한 B, B에 가려진 C, C가 가리키는 듯한 D... 의심과 질문을 반복하며 곳곳에 배치된 장치들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의 끝에 남는 것은 명확한 결론이나 파편화된 추론의 봉합이 아니라 뻥 뚫린 입을 벌리고 서 있는 공허함이다. 장면 장면에 대한 해석은 최근 그 어떤 한국영화보다 풍부할 수 있지만, 서사 내내 반복되는 질문과 의심은 끝까지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곡성>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영화인지.

어느 날, 경찰 종구(곽도원)가 사는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원인을 알 수 없는 발진에 시달리며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제 가족을 몰살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독버섯에 의한 환각작용'이라는 검식 결과가 발표되지만, 사람들은 이를 믿지 못한다. 정체가 희미한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나타난 후로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소문, 그가 동네 여인들을 희롱해 미치게 만들었다는 소문, 그가 전라로 생 고라니를 파먹더라, 는 소문... 처음에 종구는 과학의 단호함에 기대 소문의 비현실성에 실소를 던진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무명(천우희)과의 만남, 건강원을 운영하는 지인의 보다 직접적인 증언, 외지인이 괴사건 당사자들의 생전/사후 사진을 모아놓고 있더라는 동료 경찰의 목격담, 결정적으로 외지인의 거처에서 발견된 딸의 실내화 한짝 등 초현실적인 경험 후 오히려 '독버섯 중독설'을 외면하고 소문에 집착하게 된다. 마침내 딸에게서 해당 증세가 나타나자, 종구는 일련의 사건들이 어떤 식으로든 외지인과 연관되어 있음을 확신한다.


영화 내내 종구는 철저히 들은 바에 의해서만 외지인을 판단하고 의심한다. 외지인의 집에서 직접 사건 피해자들의 사진을 본 적이 없지만, 외지인을 찾아가 사진의 행방을 묻는다. 점점 악화되는 딸의 증상에 겉잡을 수 없이 급해지는 마음만큼, 종구는 약해진다. "뭣이 중한지도 모른 채" 정체도 알지 못하는 박수무당 일광(황정민)을 불러 굿판을 벌이고, 외지인이 귀신이라는 말을 맹신하여 그를 찾아가 그와 그의 개를 죽음에 이르게 하며, 그의 시신을 유기한다. 그렇게 종구에게 외지인의 존재는 소문에 대한 확신과 거기서 파생된 의심에 의해 형성될 뿐이며, 이는 종구가 외지인을 '어떻게 보는가,' '무엇으로 보는가'에 영향을 끼친다. 종구가 외지인에 대하여 행하는 행위들은 그 인식의 결과일 뿐이다. 비단 종구 뿐 아니라 영화 속 인물 거의 대부분이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가톨릭 부제인 이삼이다. 종반부에서 외지인을 초현실적인 존재이자 악령으로 확신한 이삼은 그를 찾아 나서며 가톨릭 구마의식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낫을 챙겨든다. 이제 이삼이 동굴에서 외지인과 마주하는 순간, 외지인은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손바닥의 상처로써 자신을 증명하면서 동시에 "나는 나다. 네가 악마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겠지," 라고 말한다. 결국 외지인은 이삼이 그렇게 보고자 했기에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동굴에 찾아간 것이 이삼이 아닌 종구였다면, 외지인은 종구의 의심-외지인이 부정한 방법으로 딸을 고통에 몰아넣은 범인이라는-을 가장 확실하게 확인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마지막 순간 종구와 대면한 무명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은 무명이 악귀, 라는 일광(황정민)의 말에 현혹된 종구가 무명을 다시 보자, 무명은 입고 있던 흰색 옷 대신 죽어나간 마을 사람들의 옷을 겹겹이 걸치고 있다. 종구의 의심은 증폭된다. 무명은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지만, 종구는 그녀의 발치에서 딸의 머리핀까지 보고 만다. 이제 종구는 무명의 말을 곧대로 믿을 수 없다. 이는 영화 속 표현에 따르면 인물들이 '미끼를 물고' 거기에 '현혹'되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결국 종구는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으로 달려가고, 피비린내나는 제 집보다 더 참혹한 광경,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든 딸의 모습을 본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이 얻을 수 있는 답은 기껏해야 '일광과 외지인이 한 패이며, 둘 다 악을 상징한다'는 것과 '무명이 그들의 대척점에 선 초현실적 존재'라는 것뿐이다. 마을을 점령한 참극의 원인이 독버섯인가 외지인의 저주인가 하는 질문, 또는 보다 직접적으로 영화 내내 던져지는 "왜 종구의 가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답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다만 상충하는 두 개의 보기가 제시된다.


일광은 이유가 없다, 고 말한다.

이건 악의 입장이다. 악은 당할 사람을 정해 놓고 비극의 미끼를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끼를 던졌고, 누구든 그 미끼를 삼키는 자가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무명은 '네 딸 애비가 의심하고, 죽이려고 하고, 죽여분져서' 라고 말한다.

이건 초월자이자 방관하며 조언하는, 그러나 인간의 편에 선 자의 입장이다. 무명의 논리에 따르면 특정 인물이 악의 살을 뒤집어 쓰는 것은 업보다.


결국 어떤 의지로도 이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좌절과, 고통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한 폭력의 순간 사이에 종구는 끼어있다. 누구의 말을 믿을지는 종구에게 달려있지만, 애초에 그 선택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종구가 닭이 세 번 울리기를 기다렸다면, 딸이 제정신을 회복하고 가족은 지옥도에서 벗어났을까? 나홍진의 답은 아마 "그렇지 않다"일 것이다. 외지인이 바늘에 미끼를 꿰어 낚시대를 드리우는 첫 장면이 시사하듯, 무지하고 나약한 인간과 이를 위에서 지켜보며 조종하는 초월자는 물고기와 낚시꾼처럼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낚시꾼은 미끼를 던지고, 물고기는 미끼를 삼킨다. 미끼를 물지 말라고, 즉 현혹되지 말라고 말하는 자는 조언할 뿐이지 직접 바늘에 걸린 물고기를 구할 수 없다. 무엇이 진짜 먹이고 무엇이 바늘에 꿰인 미끼인지 판단할 수 없는 물고기에겐 조언이 통하지 않는다. 그건 물고기 세계의 방식이 아닌 것이다. 의심하지 말라, 현혹되지 말라, 믿으라, 는 무명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공포 앞에서 나약하고 무지한 인간이기에 종구가 다시 의심하고, 현혹될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뭐라도 설명을 해 줘야 믿을 것 아니냐며 울부짖는 종구에게 무명은 "그냥 믿으라"고 한다. 신은 맹목적인 믿음을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외지인에 대해 말하는 종구에게 성당의 신부는 "직접 보지도 않고 어떻게 확신을 하느냐"고 되묻고, 종구는 아무 근거를 대지 않는 무명의 말을 믿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곡성>은 언뜻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의심하여 불행을 자초하는 인간 신념의 무기력함을 탓하고(이건 무명의 설명이다), 이유가 없이 벌어지는 초월자들의 놀음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을 냉소하는(이건 일광의 입장이다) 영화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종구는 살아남는다. 외지인은 이삼의 사진을 찍고, 도시로 내빼다 곡성으로 돌아온 일광은 종구 가족의 사진을 찍어가지만, 그렇기에 영화의 크레딧 뒤로 흘러가는 시간 동안 곡성에서는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겠지만, 종구는 죽지 않았다. 인간 존재의 존엄에 대한 나홍진의 믿음, 자처한 것이든 재수가 없어 당한 것이든 엄청난 고통 속에 놓인 인간에 대한 연민과 위로는 여기서 드러난다. 악은 모두 파괴했다고 믿겠지만, 조언자는 인간을 위해 악을 막아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살아있기에 인간의 의지가 모든 것을 바꿀 순간도 존재할 것이며, 지옥의 끝에서 악마가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인간은 또 다시 살아가리라는 것, 그 자체로 인간의 존재 의미는 무게를 가지는 것이다. 무명 역시 종구에게 왜 나를 믿지 못하느냐고 따져묻는 대신, 주저앉아 눈물짓는다. 신, 이라는 초월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냥 믿는 것'이 유약한 인간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렇기에 인간 대신 아픔을 떠안고 눈물을 흘린다. 무명은 다음 타깃이 된 마을 사람에게 다가가 또다시 돌을 던질 것이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차라리 잔혹하다고 해야 할 영화 전반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곡성>을 통해 던져진 인간 믿음과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들은 이렇게 종국에 가 위로의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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