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밴윙클의 신부A Bride for Rip Van Winkle>은 이와이 슌지가 자신의 소설을 직접 영화화한 작업물로, 감독으로서는 12년 만에 처음 일본을 배경으로 만든 실사영화이기도 하다. <러브레터Love Letter>나 <하나와 앨리스Hana and Alice> 등 전작과 달리, <립밴윙클의 신부>에서 로맨스를 향한 이와이 슌지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가짜 약속들은 찢어발겨지고, 절망과 기만이 사랑을 향해 가는 길목에 잠복하고 있다.
영화는 북적이는 시부야 거리에서 길 잃은 소녀처럼 초조하게 서 있는 나나미(쿠로키 하루)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계약직 교사이면서 생계를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소심한 성격의 나나미는 온라인 데이트를 통해 만나게 된 테츠오(지비키 고)와 결혼하기로 한다. 이혼한 부모님, 결혼식에 부를만한 친척이나 친구의 부재, 직장에서의 재계약 불발... 나나미는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약점이라 생각하는 것들을 테츠오에게 비밀로 한채, 다만 "플래닛(Planet)"이라는 SNS 계정을 통해서만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녀는 플래닛 친구 "람바 랄"을 통해 무슨 심부름이든 해 주는 아무로(아야노 고)를 소개받고, 그를 통해 결혼식에 초대할 가짜 친척들을 섭외해 무사히 결혼식을 마친다. 그러나 신혼생활이 시작된지 오래지 않아 나나미는 테츠오의 불륜을 의심하게 되고, 아무로에게 조사를 요청하지만 확신과 달리 테츠오의 불륜을 증명한 정황이나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순간 음모에 빠진 나나미가 불륜을 의심받아 이혼을 당하고 만다. 이혼한 부모님에게 돌아갈 수도 없고, 신혼집도 잃은 그녀는 낡은 호텔에 방을 얻어 그곳에서 일하며 숙박비를 댄다. 나나미가 불행에 빠질 때마다 나타나는 아무로는 이번에도 그녀를 찾아와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알선하며 생활을 돕는다.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 가짜 하객을 동원했던 나나미는, 이제 하객이 되어 남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거기서 또 다른 하객 마시로(코코)를 만난다. 마시로의 플래닛 대화명은 다름 아닌 "립밴윙클." 그녀는 대화명만 남기고 밤의 거리 속으로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영화 제목의 주인, "립밴윙클"은 영화의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모습을 나타낸다.
얼마 후, 아무로는 다시 나나미를 찾아와 거액의 급여가 주어지는 대저택의 입주 가정부 일을 알선한다. 저택에는 주인의 맹독성 "애완동물"만 존재할 뿐, 주인은 보이지 않고, 대신 마시로가 또 다른 가정부로 입주해 있다. 실업하고 이혼당한 나나미와 에로배우라는 이유로 가족과 절연하고 혼자 유방암으로 죽어가는 마시로, 이들은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대도시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외로운 부적응자들이다. 연약하고 소심한 나나미와 고집 세고 강한 성격의 마시로는 서로 연대하며 우정을 쌓아가고, 둘의 관계는 모성애적이기도, 에로틱하기도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두 사람이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 장면이나, 친밀함이 드러나는 씬(scene)들은 소프트 포커스와 어지럽게 돌아가는 쇼트로 가득 차, 환상적이면서 동시에 그로테스크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나나미와 마시로를 고용한 이 저택의 주인은 누구인가? 저 맹독성 애완동물들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아무로는 왜 나나미를 이 곳에서 일하도록 소개했는가? 저택은 마치 소설 <제인 에어>에서처럼 벽장 속에서 미친 여자가 걸어나와 괴기스러운 웃음을 흘린다 해도 어울릴 법한 의문에 싸여 있다. 이어 벌어지는 일들은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이자, 동시에 무응답이다. 비현실적일 정도의 불행. 나나미의 불행을 그려내는 영화의 페이스는 불규칙한 리듬 속에서 롤러코스터처럼 급격히 나아간다.
낯선 이와 술을 마시고 잠에 들었다가 20년 후의 세상에서 깨어난다는 어빙 워싱턴의 소설 속 주인공 립밴윙클과 마찬가지로 나나미는 마시로와 밤을 보낸 뒤 경악스러운 현실 속에서 깨어난다. 마시로는 간밤 '자신'의 '애완동물'의 독을 맞고 죽었고, 나나미는 아무로가 마시로로부터 거액의 '심부름값'을 받고 그녀 죽음의 동반자로 자신을 고용한 것임을 깨닫고 오열한다.
실패와 좌절에 익숙해져 세상 구석에 쭈그려 앉는 것이 편한 나나미가 태도에 변화를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이 파괴된 바로 이 시점이다. 어쩌면 "립밴윙클"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보지도 못한 채 삶이라는 꿈속에서 몽유병처럼 헤매 온 나나미의 또 다른 자아인지 모른다. 내내 초현실에 가깝던 영화는 종반부에 가 억지로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삶은 계속된다. 나나미는 마시로와 함께 살기로 했던 집에 혼자 입주하고, 언제부터 나나미를 '립밴윙클의 신부'로 점찍었는지, 끝까지 정체를 밝히지 않는 아무로는 마침내 나나미의 삶에서 제 발로 걸어나간다. 나나미가 전화로 과외를 하던 학생의 어머니는 나나미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한다. 텅 비어 무력한 자아로부터 쫓겨난 나나미는 그제야 거친 신세계와 마주하며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이토록 낭만이 배제된 이와이 슌지 영화라니. 그의 카메라는 일본 사회를 처량하게 비춘다. 영화 속 젊은이 중 누구도 정규직 일자리를 갖고 있지 않다. 영화 내내, 나나미는 한 번도 자신만의 집을 가지지 못한다. 인물들의 관계는 모두 SNS를 통해 맺어지거나, 일회성의 이벤트를 위해 짜 맞춰진다. 나나미가 진정한 사랑이라 믿었던 마시로와의 관계조차 그녀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산산조각 난다. 이리저리 떠도는 삶, 3.11 이후의 무기력한 젊음들은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라, 이 행성(플래닛, planet)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낯 모르는 이들에게 의지한다. 설사 그게 삶을 불행의 밑바닥까지 이끌더라도 말이다.
어딘가 아오이 유우와 닮은 쿠로키 하루는 가장 잘 맞는 옷을 입었고, 싱어송라이터로 더 잘 알려진 코코는 극 후반부를 끌고 가는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야노 고. 복합적인 음모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동시에 그 주범이기도 한, 대가를 받고 '고객과 함께 죽을 사람'까지 수배해 주는 가장 비굴한 악당이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삶의 죄책감으로 울부짖을 때, 이 믿을 수 없이 기이한 '립밴윙클의 이야기'는 설득력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