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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이한 Dec 31. 2023

'함께'라는 이름으로

일단 시작, 일단 도전

오전 7시에 운동장에서 모입니다.
편한 옷차림에 운동화 필수. 다들 늦지 마세요! 


때는 낙엽이 여물어 가던 가을날이었다. 운동장에는 점심도 거른 아이들이 패스를 주고받으며 몸을 풀고 있었다. 이어 기대에 찬 얼굴로 아이들이 운동장 주변을 메우기 시작했다. 12시 20분, 경기 시간이 되었다. 유니폼 조끼를 걸쳐 입은 아이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공 앞에 섰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린다. 삑- 휘슬 소리가 적막을 깼다. 시작이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체육 대회의 시즌이 돌아왔다. 점심마다 운동장에서는 학급 대항 축구 경기가 펼쳐졌다. 축구가 인생의 목표인 아이들이 죄다 선수로 선발되었고, 여학생과 남학생을 가리지 않고 자기 팀을 응원했다. 체육 대회는 선생님들에게도 즐거운 이벤트여서 담임들의 응원 열기도 뜨거웠다. 여러 날에 걸친 경기가 모두 종료되고 이제 다음 학년 경기가 이어지겠거니, 싶었는데 갑자기 담임 회의가 소집되었다. 


"혹시 축구해보실 생각 있으세요? 

 담임 선생님들이랑 우승 팀이 이벤트 경기를 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축구라면 손흥민 이름 정도나 아는 축구 문외한인 제가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ENFP 체육 선생님께서 은밀히 부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하지만 역시 선생님들이라 '아이들이 좋아해 줄 것 같아서' 모두가 참여하기로 했다. 자리에 돌아오자 컴퓨터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일, 오전 7시, 운동장, 편한 옷차림과 운동화." 빈틈없는 공격력과 추진력이었다. 




학교에 출근하기까진 1시간 남짓 걸려서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7시에 도착한 학교는 아직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을 정도로 어둠이 짙게 내려 있었다. 교무실에 대충 짐을 풀고 나오니 운동장에는 이미 몸을 풀고 있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간단하게 몸 풀고 패스랑 슛 연습 해볼게요!"


연습은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는 소리다. 내일 경기까지 우리에게 남은 훈련 시간은 아침 7시부터 8시까지 한 시간, 일과 종료 후 3시부터 4시까지 한 시간, 경기 당일 아침 7시부터 8시까지 한 시간, 도합 3시간이었다. 남자 선생님들이야 평생을 축구와 함께 살아왔으니 훈련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지만 여자 선생님들 중에서는 처음 해보는 선생님도 많았다. 나 또한 중학교 체육 시간에 발야구에서나 슛을 쏴 보았지, 축구라는 것은 접해볼 생각도, 기회도 없었다. 몇 번의 패스와 드리블, 슛을 하는 사이 체육 선생님의 판정이 내려졌다. 네, 수비수로 가시면 되겠습니다. 


아침 운동은 의외로 상쾌했다. 출퇴근 시간이 만만치 않았기에 서둘러 짐을 챙겨서 출근하는 것만 생각했지, 운동이라곤 상상해보지도 않았는데 새벽 공기를 마시며 운동장을 달리는 것도, 합을 맞추어 공을 주고받는 것도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함께' 운동을 해본다는 것. 혼자 운동에만 익숙했던 나에겐 신선한 경험이었다. 서둘러 훈련을 마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조회 시간에 들어가는데 한 아이가 유심히 나를 보다가 물었다. "선생님, 축구하세요?" 축구공 모양으로 흙자국이 옷에 유난스레 묻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보면 국가대표 훈련하는 줄 알겠네. 


다음 날 12시 20분. 경기 시작 시간이 임박하였다. 흰 티셔츠에 검정 바지로 맞춰 입고 운동장에 나서는데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포함해서 평소보다 몇 배의 관중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돈은 많이 벌고 싶어도 유명해지고 싶지 않은 나인데 이런 관심이라니. 오늘 넘어지면 일 년 동안 놀림감이다. 정신이 아찔했다. 


상대는 역시 우승 팀이라 그런지 몸놀림이 재빨랐다. 그래도 친선 경기에 1년 동안 가르쳐 준 선생님인데 전투적으로 들어올까, 싶었는데 상대는 진심이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쿠데타를 일으켜보겠나. 남학생 한 명이 순식간에 수비 진영을 파고들어 슛을 날렸다. 선생님들이 악착같이 막아 보았지만 상대는 운동 신경이 가장 활발하다 고등학생이었다. 이미 남자 경기에서 3대 1로 선생님들이 뒤지고 있었고, 여자 팀에서 승부를 내야만 했다. 


"선생님, 힘내요!" 


우리 반 기타 보이의 목소리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 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내가 힘낸다고 이 승부가 뒤바뀌진 않아...! 쌤 실력은 개발이라고...! 그 사이 전교에서 가장 축구를 잘한다는 여학생이 골을 잡고 들어왔다. 상대방의 공격 찬스다. 저것만은 막아야 했다. 공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는데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띵- 부딪힌 건 나인데 넘어진 것도 나였다. 어렸을 적 물리 시간에 2N과 3N의 합이 왜 5N이 되지 않은가 끝끝내 이해를 못 했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힘이 부족하면 그냥 쪽팔리는 거다. 


승부는 3대 3. 골키퍼였던 체육 선생님이 무승부라는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공격수로 전환하면서 2개의 추가 득점을 만들어냈다. 아이들은 입이 댓 발 나왔지만 어쩌겠는가. 먼저 도발한 건 그쪽이다. 




교직 인생의 도전은 축구로 끝나지 않았다. 수련회 이틀차 장기자랑을 앞두고 담임 회의가 소집되었다. 역시나 주축은 ENFP 체육 선생님이었다. 


"제 학창 시절에 담임 선생님들께서 노래를 불러주신 게 기억에 남아서요. 

 저희도 공연을 기획해 보면 어떨까요?"


이번 학년 담임 중에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교사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겠다는 싶었지만 단체 공연이라니. 그래도 축구로 다져진 분위기가 있어서 다 같이 한다면 기꺼이 하겠다고 의견이 모였다. 소심하고 내향적인 사람들이 많아도 일단 하겠다면 완벽하게 해내고 마는 게 교사들이라 급히 준비한 공연이라도 파트를 분배하고 율동도 맞추며 몇 시간을 연습하니 이러다가 너무 잘해서 앙코르가 나오겠다는 농담까지 할 정도였다. 


그 말이 시작이었다. 앙코르 공연까지 준비할 줄은...


밤 11시까지 노래 연습을 하다가 이제 씻고 잠들려고 하는데 숙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긴급 담임 회의 소집할게요! 회의실로 모여주세요."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싶어서 부랴부랴 회의실로 갔더니 댄스 영상을 틀어놓고 연습을 하는 선생님들이 보였다. 앙코르 공연을 대비해서 춤을 같이 준비하자는 거였다. 


춤만은 아.. 안돼...!


몸치에 박치인 제가 춤이라고요? 나이트다 클럽이다 평생 동안 춤을 등한시하며 피해온 자리를 학교에서 마주할 줄이야. 실시간으로 표정이 썩어가는 걸 보았는지 동료 선생님이 황급하게 날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저도 잘 못 추는데 같이 묻어가면 될 거 같아요." 아니, 묻어갈 정도면 그냥 안 하면 안 될까요... 


어찌어찌 타협을 보아서 유튜브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요즘 유행하는 "스모크 챌린지"를 추기로 했는데 다들 춤은 부담스러웠는지 하나둘 탈주를 시작했다. 결국 세 명이 남아 거울까지 세워두고 몇 시간을 연습하는데, 영상을 찍어보니 웬 여자 세 명이 탈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땀까지 흘리며 정말 격렬하게 췄다고 생각했는데 탈춤이 웬 말인가. 스모크가 아니라 민요를 틀어 놓으면 딱 제격이었다. 그래도 이제 돌이킬 순 없다. 못해도 박수는 쳐 주겠지. 공연 순서가 임박해 오자 선생님들의 얼굴엔 긴장이 역력했다. 


사회자의 안내 멘트에 맞춰 무대에 오르고 어두운 관객석 사이로 아이들의 표정이 보였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다들 핸드폰을 들어 영상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놀라움과 호기심과 즐거움과 놀림이 한껏 섞인 저 표정들. 진짜 죽일까 보다.  


노래를 마치고 자체 앙코르를 외치며 스모크 챌린지가 이어졌다. 30초가 순식간에 지나갔는데 그 짧은 동작 중에 제대로 춘 게 없을 정도로 모조리 다 틀려먹었다. 역시 내 인생에 춤은 없다. 앞으로도. 다시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역시나 우리 반 단톡방에 어떤 놈이 내 춤 영상을 올려두었다. 유출하면 학폭으로 처벌하겠다고(엄밀히 말하자면 학생이 성인을 가해했을 땐 학폭이 아니지만) 엄포를 놓고 학생 숙소를 점검하는데, 우리 반 문을 여니 이것들이 나 보라고 스모크 챌린지를 추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진짜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버릴까... 내가 그것보단 잘 췄다고. (삐빅, 거짓입니다)


혼자서는 하지 않을 것도 '함께'라는 이름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2023년의 마지막이 지나가고 있다. 12월 31일도 인간이 정해놓은 수많은 날짜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올해를 돌아보면 "혼자서는 하지 않을 것도 '함께'라는 이름으로 해 보았던" 한 해였다. 일주일에 한 권씩 독서를 하고, 낭독과 필사, 명상의 매력을 알게 되고,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기하거나 베트남 향토 음식을 만들어 보고, 직장에서 축구도 하고 빌어먹을 춤도 추고, 다시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기까지, 나의 취향을 깊고 넓게 만들어가는 것이 모두 '함께'의 힘 덕분이었다. 


내가 정한 삶의 틀을 깨부순다는 것, 그것은 혼자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상을 바꿀 수 있는 계기는 어찌 보면 '등 떠밂'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축구와 춤도 누군가의 제안이 없었다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시작, 일단 도전해 본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가 옆에서 툭, 건드려주는 것만으로도 삶은 많이 바뀔 수 있다. 




최근 책 중에서도 가장 마이너 하다는 희곡 읽기 모임을 기획했다. 누군가와 함께 일을 벌이는 게 익숙하지 않지만 희곡은 여러 명이 함께 읽어야 맛을 알 수 있기에 저질러보자는 심정으로 오픈했는데, 진짜로 사람들이 희곡을 읽겠다며 참가 신청을 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람이 모였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다른 호스트에게 알렸더니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 


"처음에는 지지부진한 시간을 견뎌야 할 거예요.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도, 모이지 않을 때도 있는데 호스트는 어찌 되었건 모임을 열어야 하거든요. 근데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궤도에 오르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까지 견디면 돼요."


그 말이 나에게 또 자극이 되었다. 마이너 분야라고 낙담할 게 아니라 새로운 블루 오션으로 개척하는 용기를 가져보는 것.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라면 누군가에게도 관심의 영역이 될 수 있다. 


2024년에는 또 어떤 고난과 역경이 올지 모른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대비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시작, 일단 도전하는 것 말고는 없다. 매년 똑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재미가 없으니까. 내년 이맘쯤에도 내 취향은 또 깊게, 넓혀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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