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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이한 Feb 10. 2023

한약재 골목에 들어온 스타벅스

비주류가 살아남는 방법

한 달 만에 찾은 본가였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어머니는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숙제를 나에게 들고 오셨다. 오늘은 태블릿이 말썽이었다. 고작 2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전원이 수시로 꺼지고 켜지고를 반복한다기에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딱히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집에 와서는 태블릿만 붙들고 앉아 있는 게 미안했는지 어머니는 꼬치꼬치 질문을 해댔고, 그때마다 나는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나이 든 부모님을 모시는 자녀라면 누구나 다 거쳐가는 디지털 효도지만 그리 상냥하지도, 인내심이 깊지도 않은 딸이라 내 말투엔 짜증이 묻어났다. 핸드폰을 들고 옆에서 대기하던 아버지가 슬그머니 화제를 바꾸었다.


"너 스타벅스 많이 가봤니?"

"쿠폰 생기면 가끔. 근데 갑자기 왜요?"

"특이한 스타벅스가 생겼다고 기사가 났기에 혹시 가본 적 있는가 싶어서 물어봤지. 경동시장 알지? 그 시장 안에 스타벅스가 생겼다고 하더라고."


커피 같은 건 집에서 내려 마셔도 충분하다는 아버지였지만 신문에까지 실린 스타벅스가 어떨지 궁금하긴 하셨나 보다. 대충 검색만 해도 경동시장 스타벅스에 대한 후기들이 넘쳐났고, 느지막이 갔다가는 자리도 잡지 못할 것 같아 매장이 여는 시간에 맞춰 평일 아침 일찍 가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붐비는 출근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게 부담스러운 듯 보였지만 딸내미의 닦달을 거절하진 못하셨다.


아버지와 약속한 날, 출근하는 직장인들로 가득 차 있던 지하철과는 사뭇 다르게 1호선 제기동역은 한산했다. 거리엔 각종 한약재를 늘어놓은 좌판이 군데군데 차지하고 있었고 한약 냄새가 은은하게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경동시장 골목 안쪽으로는 한약재와 농산물을 파는 가게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안을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움마저 느껴졌다. 장사 준비로 한창인 시장 골목에서 흰색 숏패딩을 입고 귀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은 채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상인들의 시선을 피하며 인터넷에서 검색한 대로 시장 4번 입구의 정관장 간판을 찾아가니 정말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초록색 세이렌이 보였다. 누군가 일러주지 않으면 여기에 스타벅스가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수줍게 걸려 있는 간판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스타벅스 경동1960점이 유명해진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LG전자의 금성 전파사, 다른 하나는 폐극장이 된 경동극장 자리를 리모델링했다는 것이다. 극장 특유의 무거운 방음문을 열고 들어서면 넓게 펼쳐진 디스플레이 벽면에서 화려한 영상이 이어졌고, 그 옆으로 스타일고침(스타일러), 기분고침(올레드), 마음고침(틔운), 개성고침(그램), 고민탈출(ThinQ), 새로고침(디오스) 코-너 같은 다양한 체험 공간이 '새로고침센터'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어 있었다. 스타벅스 내부 공간도 옛 극장의 모습처럼 계단형 구조에 높은 천장, 발코니 좌석이 모두 한 방향을 향해 배치되어 있어 이색적인 느낌이 물씬했다.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신기한 듯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고 나 또한 이곳저곳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하지만 아버지의 시선을 가장 많이 끈 것은 금성 전파사 매장 한편에 있는 옛 물건들이었다. 1980년대를 살아온 라떼만 해도 집에 금성(GoldStar) 텔레비전과 금성 냉장고가 있었던 것처럼, 금성사 제품은 집마다 하나둘 씩은 모두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국민 브랜드였다. LG전자의 역사이자 요즘 감성을 자극하는 레트로풍의 소품들이 포토존으로 전시되어 있는데, 아버지는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나의 말도 듣지 못한 채 과거의 추억에 빠져 물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들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금성 로고가 박힌 라디오며 전화기, 전압기 같은 옛날 물건들이 모두 상인회로부터 기증받은 실제 물품이라는 안내자의 설명에 아버지는 더욱 감격스러워하시는 것 같았다.



스타벅스 안에서는 또 어떠했겠는가. 화려하고 웅장한 실내 공간을 보자 아버지는 연신 사진을 찍어댔고 소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전 10시가 넘어가자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20대 청년부터 50대 중년 부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왔다. 노인들만 오가는 한약재 거리에 아무도 모를 간판처럼 숨겨져 있는 이곳까지 와서 커피를 마시다니. 스타벅스는 물론이고 다른 커피 전문점도 가본 적이 없으시다는 아버지는 이 모든 풍경이 신기하면서도 어색한 것처럼 보였다.


"요즘은 뭐 하면서 지내세요?"


아메리카노에 빵 몇 점을 나눠 먹으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작년 9월, 아버지는 드디어 은퇴를 결심했다. 만 65세까지 40년 가까운 길고도 긴 직장생활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일을 쉬어본 적이 없었던 아버지이기에 은퇴 이후의 삶에는 걱정이 많았다. 그 시절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내일 당장 출근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릴 것 같아 은퇴를 더 미룬 것도 있으리라. 하지만 해가 갈수록 체력은 소진되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워질 만큼 아버지는 나이를 먹었다. 겨울에 그만두겠다, 봄에 그만두겠다, 여름에 그만두겠다 그렇게 말만 하던 아버지는 가을이 된 작년 어느 날 마지막 퇴근을 했다.


은퇴를 기다렸던 세월만큼 아버지는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해외며 국내로 여행을 다니시느라 한동안 집에 머무를 틈이 없었고, 평생 정해진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데만 급급했던 젊은 시절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고 배우러 다니셨다. 커피, 캘리그래피, 한문, 사진, 탁구 같은 것부터 고궁, 미술관, 전시회, 음악회까지. 그전까지는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해도 흥미가 없다며 시큰둥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새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서울만 해도 이렇게 볼 게 많다는 것을 아버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 배우는 것 말고도 새로 해보고 싶은 게 있지. 일단 영어 회화를 간단히라도 시작해보고 싶고, 이번에 리움 미술관 관람 예약을 해뒀으니까 가봐야 하고."

"지금도 많이 배우고 있는데 계속 뭔가를 더 배우고 싶으세요? 집에서 쉬는 건 별로고요?"

"아빠가 영어를 배워봤자 얼마나 써먹겠니. 그래도 내가 영어로 간단하게 뭐라도 말하고 싶어서 배우는 거야. 미술 작품 같은 거도 봐도 잘 모르긴 하지. 그래도 일단 가서 구경해 보면 또 재미있거든. 우리나라 박물관이나 전시관이 이렇게 잘 되어 있다는 걸 아빠 젊었을 때는 잘 몰랐어. 해외여행 가면 꼭 전시관이나 미술관은 가보게 되고 또 가야 한다고 하잖아. 그런데 정작 서울에 있는 전시관은 안 가봤던 거야. 그래서 앞으로 많이 보러 다니려고 하지."


65세의 아버지는 나보다 열정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았다. 하루 24시간을 꼬박 다 쓰고서도 계속 새로운 것을 도전해보고 싶다는 말에 이젠 바빠서 아버지 얼굴도 잘 못 보겠다며 농담을 던지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이렇게만 살아서는 안 되지.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돼."


아버지의 궁극적인 목표는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보고 배우러 다니는 것은 나 자신의 지적 고양을 위한 것이겠지만 아버지는 남을 돕는 것이 삶에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시는 것 같았다. 마침 내가 산책을 다니며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이나 연탄 나눔 봉사활동을 알아보고 있다는 말에 아버지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60대 아버지가 참여하기엔 너무 힘이 들거나 모집 가능 연령대에서 제외되어 있었고, 아버지는 눈에 띄게 풀이 죽으셨다. 지역 동사무소에 아버지와 같은 뜻을 가진 비슷한 연령대가 있을 수 있으니 문의를 해보라는 말에 다시 표정이 밝아지셨지만 나의 뒷머리는 씁쓸하기만 했다. 발바닥에 굳은살이 배겨 이젠 오래 걷지도 못하시고 어깨도 아파 무거운 것을 들기 힘들어하시는 아버지가 과연 원하는 봉사활동을 구할 수 있을까. 앞에서는 계속 도전해 보시라고 응원해 드렸지만 실질적으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치우고 스타벅스를 나서자 밖은 손수레로 각종 야채를 박스로 실어 나르는 바쁜 시장 골목 한가운데였다.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과 상인들의 높은 목소리가 뒤섞인 공간에서 화려한 조명과 젊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가득 오갔던 스타벅스는 보이지 않았다. 점심이라도 먹고 헤어져야 할 것 같아서 시장 깊숙이 있던 청국장 집에 들렀고, 아버지는 스타벅스보다 그곳이 더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는 내 옷에 묻은 청국장 냄새를 손으로 연신 털어주었고 나 또한 아버지의 걸음이 흔들릴세라 팔짱을 끼고 걸었다. 작년보다 아버지의 몸은 조금 더 작아져 있었다.


경동시장이 있는 동대문구 제기동은 노년층의 인구가 특히 많은 지역이라고 한다. 젊은이들이 오지 않는 거리에서 전통시장은 언젠가는 수명을 다하게 될 것이고, 이를 예감한 경동시장 측에서 스타벅스에 먼저 매장 입점을 제안했다고 한다. 스타벅스와 LG전자라는 두 대기업이 손을 맞잡고 들어선 '스타벅스 경동1960점'과 '금성전파사'는 MZ들의 핫플레이스로 자리매김하면서 대성공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시장의 활성화에 보탬이 되었을지는 의문이 든다. 금성 전파사의 한쪽 구석에 경동시장 안내도가 그려져 있고 스타벅스 경동점의 수익금 일부가 경동시장 지역 상금 기금으로 조성된다고는 하지만 스타벅스 이용객이 시장을 이용하고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스타벅스를 찾는 선순환이 되기까지는 오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옛 공간을 되살려 들어왔다고 해도 화려한 첨단제품으로 장식된 젊은이들 취향의 공간에서 시장을, 골목을 되살려줄 수 있을까. 너무나도 빠르게 변하는 젊은이들의 삶에서 노인들은 자꾸 뒤처질 수밖에 없다. 주류를 차지한 젊은이들과 비주류로 밀러난 노인들이 함께 상생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공간만 나눠가져서는 안 된다. 비주류가 주류의 흐름 속에서도 편안하고 안전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결국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만 6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는 '지공선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셨다. 새해 안부인사로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메시지에 그런 단어가 적혀 있었나 보다. 지하철 무임승차가 가능해졌다는 말에 아버지는 민망한 듯 슬픈 듯 어색한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에게 이런 배려는 아직 낯설었다. 여전히 호기심 많고 도전도 해보고 싶은 아버지에게 사회는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그만 다른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시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친구가 보내준 긴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아무리 바빠도 지하철 출근 시간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중얼거리셨다. 그것이 주류에서 물러난 아버지가 젊은 세대를 위해 하는 배려였다.



<지공선사가 지켜야 할 수칙>

1. 지공선사는 출·퇴근 시 지하철 타지마라.
: 출퇴근시간에 바쁘고 비좁은 지하철에서 등산복에 배낭 짊어진 지공선사에게 젊은이들이 빨리 죽으라고 속으로 저주한다.

2. 지공선사는 자리가 경로석이다.
: 젊은이 좌석에 앉지 마라. 경로석이 비어 있는데 젊은이 자리에 앉으면 자리 하나만 줄어들어 젊은이들이 화를 낸다.

3. 지공선사는 젊은이 앞에 서 있지 마라.
: 젊은이가 피곤한데도 자리를 양보해야 하니, 곧 내릴 것처럼 문 앞에 서 있거나 경로석 앞에 서 있어라.

4. 지공선사는 눈을 감고 앉아 있어라.
: 눈 감으면 도를 닦는 것처럼 보이고 참선하는 것으로 인정받아 지공선사의 진짜 모습으로 위장된다.

5. 경로석에 앉아 있어도 지공선사는 간간히 눈을 떠야 한다.
: 내 앞에 나보다 더 늙은이가 서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나이를 비교해서 10년까지는 무시해도 되지만 그 이상이 되면 자리 양보하여라.  

6. 지공선사는 경로석에서 모자를 벗어라.
: 모자를 쓰고 있으면 10년은 젊어 보여서 가짜 지공선사로 오인받을 수 있으므로 모자 벗고 대머리나 백발을 보여라.

7. 지공선사는 경로석에서 스마트폰을 보지 마라.
: 젊은이처럼 스마트폰 만지작 거릴 나이는 한참 지났으니 지공선사 품위만 손상되고 참선하는데 방해가 된다.

8. 지공선사는 깨끗한 옷차림으로 단정해야 한다.
: 늙으면 추해지고 냄새나고 꼰대 티를 내어 젊은이들이 싫어한다. 이것을 위장하기 위해 외모에 신경 써야 대우받는다.

9. 지공선사는 정치 이야기 하지 마라.
: 젊은이들과 말도 안 통하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며, 목소리 커지고, 아는 척 많이 하며, 자기 생각만 옳은 줄 안다.

10. 지공선사는 큰 소리로 떠들지 마라.
: 과거 경력이 화려하고 거창해도, 흘러간 지식과 경험은 이제 남이 알아주지도 않고, 달밤에 개 짖는 소리일 뿐이다.

11. 지공선사는 할 일 없이 지하철 타지마라.
: 할 일 없는 노인들이 지하철을 독차지하면 젊은이들이 지하철 공짜로 태워주는 정부의 잘못을 질책하게 된다.

12. 지공선사는 경로석에서 퍼지고 앉지 마라.
: 넓게 양다리 벌리고, 두 자리를 한 사람이 차지하여 자기 안방처럼 전용하지 말고, 지공선사의 존엄과 예의를 지켜야 한다.

13. 지공선사는 경로석에 앉은 젊은이를 혼내지 마라.
: 나이 많은 게 계급도 아니고, 공짜로 타는 주제에 피곤한 젊은이가 앉아 있다고 훈계하면 안 된다.

14. 능력이 있다면 지하철 돈 내고 타라.
: 재력이 있다면, 아직은 돈 내고 타고 다닐 만하다 생각되면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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