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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이한 Jan 10. 2024

간소하게 차리는 하루 한 끼

저렴하지만 균형 잡힌 식단을 찾아서

혼삶을 시작한 지 4년 차, 위기를 맞이했다.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은 요리도, 먹고 싶은 음식도 사라졌다.


저녁 6시, 저녁 식사를 차려야 할 때다. 3일 전 만들었던 카레도 매 끼니 부지런히 먹어 이미 다 비운 지 오래, 새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 냉장고를 열어본다. 양배추, 양파, 계란... 남아 있는 식재료를 보아도 끌리는 게 없다. 한숨이 나온다. 

오늘은 뭐 먹지?


혼자 살면서 어떤 순간이 제일 고비일까?  

책상을 옮겨야 하는데 나 혼자선 힘이 벅찰 때? 아픈데 누구 하나 간병해 줄 사람이 없을 때? 그런 순간도 버겁긴 하지만 매일 찾아오는 고비는 아니다. 매일매일의 고민거리는 바로 "오늘 뭐 먹지?"이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온 세상 음식을 배달해 먹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나는 아직 집밥을 만들어 먹는 걸 고집하고 있다. 혼삶 1년 차만 해도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즐거운 소꿉놀이였다. 레시피를 찾아가며 본가에선 못 해 먹던 음식을 만드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를 겪으면서 식재료 값은 급속도로 올라갔고 이젠 즐거움이 아닌 생존을 위한 요리가 시작되었다. 마트에 가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물가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딸기 500g에 만 원이 넘다니! 대파 한 단이 오천 원이 넘다니! 배달이나 외식은 꿈도 꾸지 못한다. 


하지만 혼자 요리를 만들어 먹는 것은 한계가 있다. 


1) 레시피의 한계, 혼자서 아무리 재주를 부려봤자 고추장 베이스냐, 된장 베이스냐, 간장 베이스냐, 소금 베이스냐 그런 차이가 있다 뿐이지 4년 동안 만들어 먹다 보니 이제 그 맛이 그 맛으로 느껴진다. 요리 클래스에 가서 새로운 요리들을 배워봐도 그때만 잠시, 관성처럼 나만의 제멋대로 요리를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새로운 조미료, 새로운 식재료를 사야 한다는 건 부담이 된다. 유튜브에서 새로운 요리를 발견하더라도 '그거 하나 만들자고 조미료를 새로 사서 냉장고 한편을 채워놓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고 마는, 낭만 없는 삶이다. 


2) 식재료의 한계, 혼자 산다는 것은 나만의 삶에 익숙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음식점을 골라도 항상 가던 곳만 가는 나로선 새로운 식재료를 선택한다는 것부터가 모험이다. 당근이나 버섯, 감자 같은 만만한 식재료야 무섭지 않지만 궁채, 미나리, 마늘종 같은 아이들은 내가 도전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 당연히 연관되는 레시피도 떠오르지 않는다. 자연스레 늘 먹던 맛, 아는 맛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3) 보관의 한계, 오피스텔에 딸려 있는 냉장고의 크기는 지나치게 매우 작다. 게다가 냉동고는 터무니없이 부족한데 냉장실만 쓸데없이 차지하고 있다. 혼자 먹을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고 남은 것은 냉동으로 보관할 수밖에 없는데 냉동고는 이미 가득 찬 상태. '겨울 시금치가 맛있으니 쌀 때 많이 사서 얼려두세요!'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한다. 사두면 먹지 못하고 썩어 버리는 것도 다반사다. 


이럴 때면 식사를 공유할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옆집이든 앞집이든 아파트 공용 주방에서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요리를 만들어 먹는 모임. 내 손맛에만 익숙해져 있는 혀에 색다른 자극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매일매일의 레시피 검색에 스트레스를 받을 무렵, 방송인 파비앙의 영상이 눈에 띄었다. 


최근에 살이 많이 빠진 이유 [출처: 파비앙 Fabien Yoon 유튜브]
Q. 평소에는 무슨 음식을 드시나요? 
A. 약속이 있거나 바깥에 있지 않는 이상 거의 10년째 매일매일 똑같은 걸 먹습니다. 지겹지 않냐고요? 오히려 더 맛있게 먹는 것 같아요. 요리도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놀라운 스피드로 가능하고, 재료 낭비가 아예 없어요. 쌀, 낫또, 반숙란, 볶은 김치를 비벼서 김에 싸 먹어요. 가끔 아보카도도 넣어요. 매일 똑같은 걸 먹으니까 다른 음식을 먹을 때 배로 즐겨 먹는 것 같아요. 


이걸 보고 유레카! 를 외쳤다. 매 끼니 영양소를 고루 갖추면서도 식재료 낭비 없이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 고정 식단이 지루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원하던 최적의 식사 방식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오이비빔밥. 정확히 말하자면 오이+김+계란프라이+간장 비빔밥이다. 


비빔밥에 오이를? 처음엔 낯설었다. 하지만 먹기 좋은 크기로 오이를 썰어 넣고 촉촉한 계란 프라이에 간장 양념으로 비벼 먹는 것이 아삭아삭한 식감이 살아 있는 간장계란밥이었다. 여기에 참치 통조림이나 돈가스, 닭가슴살처럼 단백질을 추가하면 탄수화물+단백질+지방이 조화로운 다이어트 식단이 완성이다. 작년 여름에 오이 가격이 많이 오르긴 했어도 여름 한 철은 이 오이비빔밥으로 잘 지냈다. 


하지만 오이는 계절을 탄다. 겨울철이 되자 새로운 고정 식단이 필요했다. 이왕이면 계절의 영향을 적게 받고 가격 변동이 심하지 않은 식재료로... 


그러다 발견한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의 글. 렌틸콩 4: 귀리 2: 현미 2: 백미 2의 비율로 밥을 지어먹으면 밥만 먹어도 영양 균형을 고루 맞출 뿐 아니라 하루 49g의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다고. 매끼 단백질 균형 맞추느라 고기 사 먹는 것도 일인데 유레카다. 게다가 모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저렴한 식재료들이다. 


매끼 쉽고 편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고정 식단을 마련하기 위해 최근 정착한 식재료는 버섯, 두부, 콩나물, 당근 같은 것들이다. 평범하지만 언제나 쉽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것들. 새로운 식재료를 시도하고 요리하는 것도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겠지만 고정 식단을 만들기엔 적합하지 않다. 나는 집밥에서 '새로움'이 아닌, '간소함'을 추구하고자 한다. 나머지는 가끔 있는 외식에서 해결하면 된다.  


오늘은 마침 반찬을 채워 넣어야 하는 날이었다. 어제 사둔 버섯과 두부, 콩나물, 애호박, 무, 양파를 준비한다. 오랜만에 냉동실에서 어묵도 꺼내 보았다. 오피스텔에 딸린 화구는 기껏해야 2개. 그마저도 화력이 약한 하이라이트지만 반찬 정도는 후딱 해치울 수 있다. 


일단 무채를 썰어 소금에 절여두고 나머지를 순서대로 손질한다. 오늘의 메뉴는 무나물, 콩나물 무침, 들깨버섯볶음, 애호박볶음, 어묵볶음, 두부지짐 총 6개다. 큰 양파 하나를 썰어 애호박과 어묵에 반절씩 넣어두고 다진 마늘을 골고루 나누어 넣은 다음 신나게 볶는다. 한 시간을 투자하니 반찬 6개가 접시에 담겼다. 


렌틸콩~백미밥은 2:1:1:1 비율로 하면 렌틸콩 맛이 너무 강했다. 최근엔 1:1:1:1 비율로 짓고 있다.


밥 반 공기에 반찬 한 접시를 먹으니 포만감이 가득이다. 당분간은 이렇게 3일에 한 번씩 반찬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욕심을 부린다면 여기에 초록 채소 반찬을 더해보는 것. 다음에는 마트에서 시금치 한 단을 사 와야겠다. 알배추로 무침을 해 먹어도 좋고. 


반찬을 매번 만드는 것이 품이 들긴 하지만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정해져 있다면' 생각보다 수월하다. 이러다 질리면 또 원팬 요리를 했다가 다시 반찬을 만들었다가 그때그때의 마음에 따라 또 달라질 수 있겠지만, 추운 겨울에 따뜻한 밥 한 끼를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사소하지만 소소한 행복거리가 된다. 


내일도 오늘과 같은 시간에 오늘과 같은 식사로. 혼삶도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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