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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지완 May 30. 2021

나는 왜 나의 성공을 두려워할까.


"글 잘 읽었어요. 첨부터 끝까지 한 번에 읽게 하다니.. 대단해"

"고마워 글 넘 잘 적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손 작가님 ^_^"



감사하게도 최근 글에서 많은 칭찬을 받았다. 글쓰기는 나라는 사람의 정수를 표현하는 작업이다 보니, 이에 대한 인정은 짜릿했다. 하지만 비판받을 땐 벌거벗은 채 그대로 도려내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렇듯 양극단을 내달리는 기분은 모순적인 생각을 유발한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좋은 평과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 비판에서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지만, 나의 바램은 이성의 소관이 아닌 듯하다.



요즘엔  'Feeling good' 읽고 있다. 인지치료에 관한 내용으로,  페이지를 넘기기 무섭게 흥미로운 통찰이 거듭 등장한다. 덕분에  페이지 수는 느리게 넘어가고 글감은 넘치는 중이다. 오늘은 우울증을 겪는 이들이  행동하지 않은  해야  일을 미루는지, 다시 말해 '지연 행동'  발생하는지에 대한 부분을 읽었다.  13가지 이유가 제시되었는데, 그중 눈길을  부분은 '성공을 두려워함'이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자. 성공을 두려워한다니.. 그런 사람이 있을  있나?



알고 보니 나와 꽤 관련이 있었다.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이 이뤘던 '과거'의 성공을 두려워한다는 의미였다. 왜 과거의 영예를 두려워하게 되는 걸까? 이전의 결과물을 넘어설 자신이 없고, 오히려 과거의 성공이 타인의 헛된 기대만 드높였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치 다음 도전에서 이전만큼의 결과를 내지 못하게 됨으로써 자신이 근본적으로 '실패자'였다는 치욕스런 사실(인지 왜곡)이 드러나게 될까 봐 겁나는 것이다.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는 한 곡만 크게 히트를 친 가수를 말한다. 이들이 다음번 발매에 자신의 과거 성공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들은 음악을 재미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과 가족의 밥줄이 걸려 있다. 반면, 대중은 냉정하다. 전보다 못한 앨범에는 가차 없이 '퇴물'이라 평가한다.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면 견뎌내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차라리 시도를 하지 않는 게 낫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전략이 마음을 진정으로 평온하게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회피로 인한 이득은 본질적인 쾌락을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는 존재에 큼지막한 구멍을 내놓고 문제를 도려냈으니 괜찮지 않냐고 묻는다면,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자취를 감췄으나 동시에 귀중한 가치들도 함께 사라졌다고 답할 것이다.

 


이제는 다르게도 생각해보자. 타인의 기대는 그저 부담스럽기만 한가? 분명 그러한 면이 있지만, 사실 감사한 면이 더 크다. 그들은 나의 과거를 대단하게 여겨준다. 나를 질투하며 어떤 식으로든 비난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의 기대를 겸허히 짊어진 채, 감사를 표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가능한 노력을 기울여보자. 물론 최악의 가정으로, 과거의 나를 끝끝내 넘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아쉬움을 드러낼 수 있고 이 때문에 오래도록 위축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걸 뭐라 할 수 있을까? 어쩌겠는가. 그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좋아해 줬다면 기뻤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 과정 속에서 이미 과거의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그러니 감사하며 다시 한 걸음 내딛으면 된다.

 


 흘리며 찌푸리되, 인내하고 짊어진  어쨌든 이어가는 사람. 결과의 실패보다는 '시도하지 않은 것과 과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 두려워하는 쪽이  낫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점이 있다. '결과의 실패는 사실   아니며 실패라는  없다' 무지한 생각이다. 이는 겉보기엔 좋지만 틀린 말이다. 실패는 실패다. 어떠한 감상적이 말로 덮어도 실패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꾸며낸 말은 진실을 흐리며 무익, 나아가 유해하다. 내가 하고 싶던 말은, 결과는 아주 중요하지만 그게 나의 전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성공', 그리고 '성공적인 실패'. 실패는 복기를 위해 존재한다. 어느 부분에서 부족했는지 다음엔 어디를  보완하면 좋을지 분석하는 순간, 실패는 클리셰처럼 그러나 오랜 지혜처럼 '성공의 어머니' 된다.



글쓰기가 두려울지 언정 멈추지 않으려 한다. 감정과 소통한 채 나아갈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내가 추구하는 '멋'에 부합한다. 용기 있는 도전은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다. 그 후, 결과를 향한 타인의 판단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며 그들에게 과정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건 무리다. 그러나 '나'만큼은 그 역겨운 순간들을 모조리 기억한다. 스스로가 알아주는 거면 충분하다. 결과의 성공은 과정의 값진 인센티브일 뿐, 나를 멈춰 세우는 족쇄 따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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