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집 주인의 생업가 글쓰기 병행기
민박집 주인의 생업과 글쓰기 병행기.
2015년 독립출판 한 <제주의 작은 작업실>은 절판 되었습니다.
책은 사라졌어도 글만은 남기고 싶어 브런치에 옮겨놓습니다.
오래 전, 청소년 권장도서라는 게 있었다.
헤밍웨이며 도예도프스키며 톨스토이며, 목록에 있던 책들은 마치 청소년 인내심 함양 교재 같았다.
헤밍웨이는 왜 노인이 청새치를 잡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많은 종이를 써야 했을까.
도예도프스키는 또 어떤가.
가난한 학생이 고리대금업자를 죽이고 죄책감을 느끼는 이야기를 하는데 쓴 종이가 얼마인가.
톨스토이는......
나는 노인이 문제의 그 청새치를 만나기도 전에 이야기가 지루했다.
라스콜니프가 고리대금업자를 죽이기도 전에 책을 덮어 버렸다.
내가 조울증처럼 자주 감정이 업다운 되는 것이 교육청에서 하달한 청소년 인내심 함양 교재를 다 떼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려서 그런 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읽는 능력에 어떤 문제가 있는, 그러니까 글 쓰는 사람이 되기에는 재능 없음이 오래전에 판명 난 것인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나는 군대 간 아들 방을 정리하며 버리려는 이웃집의 책을 얻어다 읽었고, 친구에게서 언니의 연애소설을 빌려다 읽었다.
특별히 심취해 있었던 장르나 분야는 없었다.
내 인생의 책이라고 할 만한 것도 딱히 없는 가벼운 독서력이었다.
그 당시 나의 양식이 얼마나 저렴했는지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자극적인 소재에 문학적 색채를 살짝 입힌 한낱 야설가로 치부했었다는 민망한 고백으로 대신하겠다.
대작가들은 하나같이, 글을 쓰는데 있어서 필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훈련과 노력이라고 말한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재능이라는 것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한다.
대입 전국 수석의 비법이 교과서 위주의 학습이었다는 인터뷰처럼, 재능 따위 필요 없다는 그 말이 실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위로는 아닐까.
학습효과의 최고봉은 단연코 사교육이었음을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것처럼, 작가로서 지금의 자신을 만든 건 타고 난 재능 덕분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면, 만약에 나도 대작가의 반열에 올라선다면 (만약이니까 이런 가정이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재능 보다는 훈련과 노력 덕분이라고 말할 것 같긴 하다.
다만, 재능이라는 것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허상 같은 것이라는 말도 꼭 보탤 것 같다.
물론 근거는 없다.
대작가의 말이니 대부분 믿을 것이다.
그것이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 작가 지망생들에게 재능을 타고난 대작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일 테니.
우리는 작가의 은밀한 집필과정을 모른다.
대부분 작가들의 작업실은 밀폐되어 있고, 필승의 다짐만큼이나 단호하고 절박한 외부인 출입금지의 깃발이 나부끼기 때문이다.
작가가 죽을힘을 다 해서, 된똥, 물똥, 피똥까지 싸가며 글을 쓰는지, 놀 것 다 놀고 잘 것 다 자고 하물며 쾌변의 희열까지 느끼며 글을 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니까 글을 쓰는 재능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거지.
설령, 똥을 잘 싸는 것과 글을 잘 쓰는 것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 한들, 배변기능을 좌우하는 것은 그 외에도 무수히 많다.
글을 쓰는 재능이라는 것은 실체를 확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무슨 해괴하다 못해 더럽고 냄새까지 나는 궤변이냐고?
그러니까 나는 이제부터 글 쓰는 재능을 타고 났다고 믿기로 했다는 말이다.
어차피 실체도 없는 거, 타고 났다고 우기다 보면 타고 난 것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한 층 진화된 “자뻑 version 2.0” 되시겠다.
우리 모두 해보자!
옴마니반메홈 나는 재능을 타고 났다 옴마니반메홈 나는 재능을 타고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