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또 다른 작업실

민박집 주인의 생업과 글쓰기 병행기

by 변방의 공돌이

민박집 주인의 생업과 글쓰기 병행기.
2015년 독립출판 한 <제주의 작은 작업실>은 절판 되었습니다.
책은 사라졌어도 글만은 남기고 싶어 브런치에 옮겨놓습니다.



반석빌라로 이사 온지 6개월.
20년은 족히 됐을법한 낡은 빌라를 이렇게 만족스러워할 줄은 우리도 몰랐다.
마리와 함께 세 식구 지내기에 최적의 면적일 뿐만 아니라 층간소음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이웃들 덕분에 우리도 덩달아 무긴장 상태의 뒤꿈치 워킹이 가능하며, 적당한 고성방가도 허용되는 공동주택이다.
거실에는 작업실까지 갖추고 있으니 눈, 비, 바람 때문에 밖에 나가기 싫은 날에는 주거환경 만족도가 도표를 뚫고 나갈 기세로 직각 상승한다.
물론 완벽한 작업환경이라는 건 없어서 여전히 동네의 카페를 전전긍긍하며 글을 쓰는 날이 많다.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공간을 옮겨 다니며 글을 써야 하는 이 예민한 성격 때문에 매달 커피값 지출이 상당하다.
감정기복이 심한 나는 허술한 자기관리 때문에 대작가는커녕 그냥 작가가 되기도 그른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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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벗어난 곳에 작업실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작가는 못되더라도 그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한결같은 작업공간이 필요하다는 명분이지만, 진짜 이유는 최상급 골초의 하루치 담배값에 육박하는 커피값이라도 아껴보자는 것이 첫 번째요, 매일 글을 쓸 수는 없으니 거기서 동네 친구들끼리 모여 놀기도 하자는 것이 두 번째요, 매일 놀 수도 없으니 혼자 있을 때 글을 쓰자는 것이 세 번째 이유되시겠다.
내가 바라왔던 바닷가 마을의 창고. 갈매기가 보이는 위치에 창을 내고, 그 창 옆에 넓고 긴 6인용 책상을 놓고, 그 반대편에는 2인용 소파를 놓고, 가운데에는 난로를 놓고, 또 한쪽 벽에는 조그만 주방을 만들어서 커피 도구를 놓아 둘 그런 공간이면 좋겠다.
대여섯 명 정도의 이웃 친구들이 모여서 비정기적인 독서모임을 가질 수도 있는 공간.
커피와 쿠키를 준비해 놓고 난로에 미리 장작을 피우고 기다리고 있으면 친구들이 하나둘 모이고, 각자 편한 자리에 앉아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시간이 되면 소리 없이 일어나 사라지는 그런 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을 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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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로 쓸 공간이 있다.
그것도 내 소유의 건물이다.
민박손님들이 약간의 음주와 담소, 아침식사를 하는 곳이다.
오래전, 허물어져 있던 축사를 개축해서 만든 공간으로 휴게실이라고 부르기엔 뭔가 격이 떨어져 보이고, 그렇다고 고급스럽고 우아한 이름이 딱히 떠오르지도 않아서 그냥 카페라고 부르고 있다.
어쨌든 저녁때 들어 왔다가 아침에 나가는 민박손님 외에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그 공간을 지금까지 내버려 두고 있었다.
사실 다 이유가 있다.
오로지 민박손님을 위해서 만든 그 공간이 나에게는 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갈 수 있으면 나가고 싶고, 안 들어갈 수 있으면 안 들어가고 싶은 여러분의 사무실을 떠올려 보라.
그래도 전기난로 하나는 놓을 수 있고, 친구들 대여섯은 거뜬히 수용할 수 있으며, 한쪽에는 주방이 있어서 커피도구도 구비되어 있으니 내가 바라던 최적의 작업실이 아니겠는가.
다만 들어서 옮길 수는 없는 그 건물의 위치가 하필이면 바닷가가 아니라는 것.
그러나 지금 창 밖에는 갈매기가 날아다닌다고 상상해 버리면 그것은 티티카카 호수에 빠진 이쑤시개와 같은 하찮은 흠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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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새로 꾸미기 위한 궁리가 시작되자 예상치 못한 숟가락이 하나 더해졌다.
전기난로를 사겠다고 하니 워니가 나서서 그 위에 얹어 둘 법랑 주전자를 결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실소유주가 따로 있지 않는 부부 공동재산이니 자기도 거기서 바느질을 하겠다며 공간 공유를 강력히 요구했다.
난로 위에서 보리차가 끓고 있는 주전자의 김을 바라보며 바느질을 하는 것이 평소의 로망이었노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다.
전기난로 위에서 물이 끓을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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