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제주의 작은 작업실

민박집 주인의 생업과 글쓰기 병행기

by 변방의 공돌이

민박집 주인의 생업과 글쓰기 병행기.
2015년 독립출판 한 <제주의 작은 작업실>은 절판 되었습니다.
책은 사라졌어도 글만은 남기고 싶어 브런치에 옮겨놓습니다.



요 며칠 따뜻하다 했더니 또 추워졌다.
삼한사온의 주기로 변하는 것이 한국 겨울날씨의 특징이라지만 뭔가 이상하다.
따뜻한 날 나흘, 추운 날 사흘의 주기가 자연현상 치고는 지나치게 규칙적이어서 어딘가에서 해와 구름과 바람의 양을 조절하는 기계를 조작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 된다.
그 어딘가는 냉난방 기기의 판매량과 전기료와 소비심리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물가를 조절하기 위해서 창설된 청와대 직속의 ‘날씨 조절청’이라는 곳이 아닐까도 의심된다.
그렇다면 그 기관은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도 전기난로를 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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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니와 나는 따뜻한 작업실에 앉아서 오후를 보내고 있다.
뻘겋게 달아오른 전기난로가 채워준 온기 위에 커피향까지 내려앉은 작업실은 추운 겨울의 오후를 보내기에 더없이 포근하고 안락한 공간이 되었다.
민박집 청소를 끝내고 점심을 먹고 나면 온전히 남는 오후의 시간.
그날의 민박손님이 입실할 때까지 동네의 카페에서 글을 썼던 시간은 마치 전쟁 같았다.
입실시간에 쫓겨서, 예약전화까지 받아가며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트위터 친구에게 멘션이나 날리고 있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산만함이 아닐까.
작업실을 새로 꾸민 후, 이곳에서 글을 쓰는 오후의 시간은 더 이상 전쟁이 아니다.
때론 나 혼자서, 때론 워니와 둘이서 보내는 오후는 자유시간과 민박손님의 입실시간의 경계가 없어졌다.
입실시간이 되었다고 해서 작업을 멈출 필요 없이 이대로 오늘의 손님을 맞이하면 되기 때문이다.
경계를 허물자 두 개의 시간이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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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로 꾸미기 전, 민박집의 카페였던 이곳은 우리의 공간이 아니었다.
오로지 민박손님 정원 8명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2인용 테이블 4개와 조식제공을 위한 사이드 테이블 그리고 조그만 주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민박손님 중 누구는 맥주나 소주나 막걸리나 와인을 마셨고, 여행지에서의 밤을 술로 채우고 싶지 않은 누군가는 조용히 책을 읽었고, 술도 싫고 책도 싫은 누군가는 수다를 떨거나 다음날 여행계획을 짜며 편안하게 시간을 보냈다.

저마다의 밤을 보내는 여행자들에게는 의도와 기능에 부합하는 그 카페가 우리에게는 직장이었다.
민박집 영업을 하는 날에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곳이었고, 객실 청소가 끝나면 부랴부랴 문 잠그고 나가기 바빴다.
오후마다 노트북이 든 백팩을 메고 동네의 카페를 전전긍긍 할지언정 낮에는 비어 있는 이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었다.
테이블의 위치를 옮기고 내부에 페인트를 다시 칠하고, 소파와 전기난로를 놓고 카펫을 깔고 나니 직장이었던 이곳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워니와 내가 매일 뭔가를 쓰고, 읽고, 만들며 노는 놀이터 겸 작업실이 만들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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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겠지만, 새 작업실에서 글을 쓰다가 지겹거나 잘 안 풀리면 나는 바느질을 한다.
주로 조그만 인형을 만든다.
한 때 미치듯이 기린을 만들다가, 고래를 만들기도 했고, 요즘은 정어리에 꽂혀 있다.
얼마 전엔 정어리 12마리를 나뭇가지에 엮어서 모빌을 만들어 작업실에 걸기도 했다.
아무래도 안 믿을 것 같아서 사진을 첨부하니 그 꼼꼼한 완성도와 작품성에 놀라지 마시라.
부업으로 팔아볼까도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광고카피도 생각해 놨다.
“바느질하는 남자의 정어리 모빌-여러분의 공간을 바닷속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머리나 식힐 겸 시작했던 손바느질이 이제는 힐링의 수단이 되었다.
정어리 한 마리를 만드는 동안 안 풀리던 문장이 번득하고 떠오르기도 하고, 쉬지 않고 대여섯 마리쯤 만들다 보면 꽉 막혀 있던 머릿속이 뻥 뚫릴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그 옛날 과거준비에 여념 없는 낭군님과 별거하던 여인들이 독수공방의 긴긴 밤을 보내기 위해 왜 바느질을 했는지도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단순노동에 몰입해 있는 무의식의 상태가 심신의 위로와 치유에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안 해 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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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은 글을 쓰는데 필요한 딴짓거리를 위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내 취향의 음악을 틀어 둘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커피를 내릴 수 있고, 졸리면 발 뻗고 눈을 좀 감을 수도 있고, 바느질 같은 것도 할 수도 있어야 지속적인 글쓰기가 가능한 것 아닐까.
혹시 아나? 글보다는 딴짓으로 유명해져 버릴지도.
정어리 모빌 사업이 대박나 버리는 건 아닌지 벌써 걱정이다.

뭔가를 쓰고 읽고 만들고 노는 곳.
제주의 작은 작업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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