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마을은 조그맣고 한가한 시골....
마을 공판장에 서는 버스는 하루에 여섯 번....
급한 볼 일이 있을 땐 20분을 걸어 고개를 건너가야 서울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어....
오늘 아침 일찍 나는 고개 넘어 정류장에 들어오는 첫차를 타려고 집을 나섰어.
현관문을 여니 아직 이른 봄이라 그런지 서늘한 공기에 한 번 오싹.. 몸서리를 쳤지.
아니 어쩌면 새벽 공기가 원래 이렇게 낯설고 섬뜩할 지도..
계단을 내려와 마당의 감나무의 검은 실루엣에 나는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어
어릴 적 밤에 혼자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가기 싫어 웅크리고 오줌을 참던 이유가 저 검은 감나무였단 걸 잠깐 잊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이제 어른이고 감나무 따위 무섭지도 오줌을 참을 필요도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조금 용기를 내어 마당을 가로질렀어.
그리고는 대문을 나서 큰길로 향했지.
혹시 달빛이라도 있으면 의지하려고 했는데 저 아래 가로등까지 시야는 검은 망토를 둘러싼 밤 공기만 자욱했어.
그래도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어.
낮에 태양빛 아래에선 숨어있던 시냇물 소리는 밤이 되니 선명하고 이렇게 맑을 수가 없었어.
어떤 것들은 한낮에는 존재조차 희미하던 것들이 세상이 잠들고 나면 빛으로 음악으로 또는 서늘함으로 사람을 놀래키는 것 같아.
시냇물 소리에 왠지 새벽 공기가 맑게 흐르고 있는 착각이 들었어.
이제 큰길 가로등에서 왼쪽으로 틀어 고개를 넘어가야 해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밤새 거미줄이 가로수에서 보도블록까지 빽빽이 쳐져있었어.
이렇게 부지런히 일을 하는데...
평상시 같으면 막대기 하나 치켜들고 거미줄을 걷으며 인도를 걸어갔겠지만 오늘 새벽은 이 작은 거미의 노력과 생명을 귀히 여겨 찻길로 내려와 걷기로 했어,
터덜거리며 걷고 있는데 밤사이 피었는지 아니면 그동안 몰랐는지 매화꽃이 가로등에 반짝였어.
저 질기고 단단한 나무 가지에서 어떻게 저렇게 작고 여린 꽃이 피어났는지...
그리고 지치지도 않고 매년 또다시 꽃을 피워내는지...
기특하고 기특해서 마음이 아련해졌어.
이 새벽에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차가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찻길을 걸어가는 마음은 조마조마...
하얀 매화꽃과 얽힌 거미줄이 서늘한 시냇물 소리와 함께 나의 불안에 훅하고 바람을 불어넣었어.
방금까지 반가운 친구 같았던 것들이었는데...
작은 길 속에서 금세 오갔던 마음이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여 걸음을 조금 재촉했어.
고갯길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저 아래 길까지 내려가는 길이 구불구불...
그렇게 내려가면 나는 서울 가는 첫차를 타고
마지막 가는 우리 할머니 볼 수 있겠지?
나 어릴 적 무서운 밤에 할머니 품으로 숨어들면 그 거슬거리는 손바닥으로 등을 문질러 주시고
나무 등걸 같은 손등으로 개울에서 등목도 시켜주시던
가끔씩 주름 한가득한 얼굴에 하얀 매화꽃 같은 웃음을 지어주시던 우리 할머니...
평생 거미줄 치듯이 우리 사 남매 감싸주시던 우리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며칠만 모셔봤으면 내내 생각만 했던 우리 할머니....
이렇게 보내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