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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나다 May 08. 2023

오랫동안 친정엄마를 미워했었다.

애증의 모녀관계



 친정엄마는 시원시원한 성격에 대장부 같은 스타일이다. 결심했으면 실행이 빠르고, 사업도 몇 번 하셨다. 말도 생각나는 대로 내뱉고, 자긴 솔직해서 앞뒤가 다른 사람은 딱 질색이라며, 적어도 자긴 뒤끝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가 마음껏 내뱉은 말들이, 나에겐 상처였다. 엄마는 내뱉고 뒤끝이 없다 했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뒤끝이 생겨 괴로웠다.



 어린 시절부터 학창 시절, 20대까지의 나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여린 감성을 지녀서 조그마한 모진 소리에도 상처를 받았다. 멘탈은 또 어찌나 약한지 엄마의 말 한마디에 무너지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온실 속 화초같이 자란 여자아이가 나였다.



  나는 지방대를 나왔기 때문에 부모님 집에서 통학을 했다. 그 흔한 기숙사도, 자취도, 해외연수나 워킹홀리데이도 해본 적 없다. 혼자 독립해서 살아본 적 없으니 집을 구해본 경험도 없다.



 성인이 되면서 다듬어진 사회성과 처세술, 살아가기에 적합한 멘탈을 갖추게 되면서 조금씩 사람 구실할 수 있었지만, 10대, 20대 시절의 나는 아주 허접했다.


 

 그 시절엔 생각 없이 상처 주는 말들을 툭툭 내뱉는 무신경한 엄마가 미웠다. 공감능력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하고 항상 조금씩 엇박 나는 엄마가 아쉬웠다. 나도 마음껏 감정적으로 위로받고, 어리광 부리고, 투정도 부리고 싶었다.



 나의 모든 걸 알고 싶어 하고, 서운해하고, 통제하려 드는 엄마가 못 견디게 갑갑하기도 했다. 마주치면 습관처럼 쏟아내는 엄마의 비난 섞인 말들이 너무나도 듣기 힘들었다. 엄마 앞에 설 때면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자괴감에 괴로웠다.



 엄마에게 마음의 문을 닫게 된 결정적 사건이 3가지 있었다.



 상처받았던 일들이 너무 많았지만 지금은 대표적인 3가지 정도만 기억난다.



 첫 번째 사건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중학생이 되고 첫 소풍을 가기 전날, 같이 놀던 무리의 아이들과 싸워 혼자가 되었다. 다음 날 소풍 가면 누구랑 다녀야 할지, 도시락은 누구랑 먹어야 할지 너무 걱정이 됐다. 그 당시엔 친구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걱정하다 엄마에게 털어놨는데 팔짱을 끼며 싸늘한 눈초리로 차갑게 이렇게 말하셨다.



 "얼마나 찌질하면 같이 소풍 갈 친구 하나 없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차갑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덩달아 나까지 차분해졌다.



 그 뒤로 엄마에게 친구관계에 대해 조언을 구하거나 감정적으로 의지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왕따로 맘고생하던 때에도 나 홀로 묵묵히 그 시절을 견뎠다.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되고 나니, 엄마가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게 엄마에게 살뜰하지도 않고, 조곤조곤 고민 상담하지도, 의지하지도 않고, 혼자서만 해결해서 서운하다'라고 하길래 속으로 외쳤다.



 '왜 엄마는 학창 시절에 내가 힘들 때, 엄마에게 의지하고 싶었을 땐 매몰차게 외면하더니, 이제 혼자에 익숙해진 성인이 되니까 의지하지 않는다며 서운해하는 거예요?'라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속으로 삼켰다.



 두 번째 사건은, 지금은 개그 소재로 간간히 써먹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교육열이 남달랐던 엄마는, 이것 저것 조기교육을 많이 시켰다. 아마 자식 잘 키워서 자식들 덕 좀 보고 싶었나 보다. 피아노, 미술, 바둑, 합기도, 검도, 수영, 바둑, 영어 등등 안 배워본 게 없을 정도였는데, 내가 중학생 때였나, 고등학생 때였나, 나에게 원망하듯 따졌다.



 '너는 투자대비 성과가 안 나왔어. 넌 조기교육의 실패작이야.'



 그 당시엔 '실패작'이란 그 말이 왜 그리 가슴에 사무치던지 펑펑 울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따졌더니, 이해할 수 없단 듯이 '맞잖아. 맞는 말 했는데 왜 울어?'라고 대답하는 엄마를 보며, 저렇게 공감능력 없는 엄마가 내 엄마라니, 하며 한탄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간간히 이때의 에피소드를 써먹는다. 이젠 그때만큼 펑펑 울 정도로 속상하진 않다. 속상함도 세월이 갈수록 무뎌지더라. 



 뒤집어 생각해 보면 엄마는 내가 배우고 싶은 것들은 아낌없이 배우도록 지원해 주셨다. 지금 이렇게 예술적 관심이 지대한 어른으로 자라난 것도 유년시절의 다양한 경험 덕분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아이 둘을 키우는 지금, 그 당시 그 모든 학원비를 지원했던 아빠의 능력치가 너무나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세 번째 사건은, 엄마의 말들이 너무 나에게 상처라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는데 되돌아온 답변이었다.



 '넌 너무 예민하고 툭하면 상처받아서 뭔 말을 못 하겠다'



 툭하면 상처받는다며 예민한 사람 취급하고, 조롱당한 기분이었다. 이 사건 뒤 나는 엄마와 6개월간 연락을 끊었고 왕래하지 않았다. 다 큰 성인이 된 후 겪은 일이다. 엄마와의 관계에 더 이상 조율할 여지없이,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느꼈다.



 엄마에게 나는 살가운 딸이 아니었다. 매스컴에서처럼 서로에게 애틋한 모녀사이가 아니었다. 우린 오히려 애증의 관계에 가까웠다. 싸울 땐 서로의 밑바닥을 보았다.



 이제 세월이 지나 나 또한 두 딸들의 엄마가 되었다. 지금은 엄마가 최고라며 엄마 껌딱지인 두 딸들도 세월이 지나 언젠가는, 서로를 못 견디게 증오하고 날 선 감정의 말들을 쏟아내며 애증의 관계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k-장녀였고, 때때로 엄마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받아내기 힘들었다. 똑같은 실수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서 딸들에게 하는 말들을 자체 검열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엄마와 딸이기에 서로를 못 견디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겪어봤기에, 사회가 만들어놓은 사이좋은 모녀관계의 이미지가 차라리 신화에 가깝다고 느낀다.



 우리는 서로를 치열하게 못 견디다가도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의 주변을 빙글빙글 돈다.



 나는 왜 그동안 예전의 상처에 갇혀 그토록 오랜 시간을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해 왔을까.



 힘든 순간 엄마가 도와줬던 많은 도움의 손길들은 잊어버리고, 왜 상처받았던 기억들만 차곡차곡 쌓아 틈날 때마다 되새겼을까.



 엄마는 연년생 딸 둘을 친정에서 100일 동안 같이 키워 주셨다. 육아를 아낌없이 도와주셨다. 비록 폭풍 육아 잔소리를 하셨을지언정.. 내가 코로나로 아플 때, 몸살로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 날 챙겨준 것도 친정엄마다. 가정을 꾸리고 엄마가 되니 마음대로 아플 수 없었다. 아플 때조차 사방에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뿐이고 날 챙겨줄 사람 하나 없을 때, 날 챙겨준 유일한 사람은 친정엄마였다.



 '남편이나 아이들 챙기는 것도 좋지만, 널 제일 먼저 챙겨. 아무도 널 챙겨주지 않으니 너라도 널 잘 챙겨.'



 가정을 꾸린 뒤 듣는 친정엄마의 말 한마디가 따스해 오랫동안 얼었던 마음의 얼음조각들이 조금씩 녹아드는 기분이다.



 나의 상처에만 몰두하느라, 어버이날이라고 그동안 제대로 챙기지 못했는데, 주문한 떡케이크와 용돈을 전해드리며 함께 식사하는 와중에, 아이처럼 좋아하시는 친정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우린 왜 진작 이렇게 지낼 수 없었을까, 생각해 본다.



 우린 서로 오랫동안 '내가 더 깊고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다'라고 각자의 목소리를 높였다. 서로 깊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내가 아팠던 만큼, 엄마도 아팠음 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억울하진 않을 것 같았다. 이제와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엄마의 가슴에 피멍의 흔적을 남겼다. 내가 연락두절했던 6개월 동안 엄마는 매일 악몽을 꾸고 울었다고 했다. 그 당시엔 엄마를 마주하면 내가 살 수 없었다. 일단 내가 먼저 살아야 해서 단절했다. 상처받을 게 불 보듯 뻔한데 상처받을 환경에 지속적으로 나 자신을 노출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당시의 죄책감은 틈틈이 고개를 쳐든다. 



 오늘 아이처럼 웃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나의 상처에만 몰두했던 지난날들이 우습게 느껴졌다. 나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나의 상처만 중요히 여겼을까. 상처에 몰두하느라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이 아쉽다. 하지만 치열하게 싸우고 친정엄마를 원망하고 미워했던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 같은 날은 오지 않았을 거다. 이제는 너무나도 깊숙이 달라붙어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상처들을 그만 놓아주고 싶다.



 어디선가 읽었던 문구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당신이 상처에 집중하면 계속해서 고통받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이 무엇을 배웠느냐에 집중하면, 당신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ㅡ브라이언 웨이너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엄마의 모진 말들을 들었던 중학생에서 멈춰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나의 상처를 알아봐 주라고 징징거렸다.



 이제는 지난날의 상처에 집중하는 대신, 앞으로 쌓아갈 날들에 관심을 두고 싶다. 징징거릴 수 있는 최대치를 넘어서 홀가분하다. 앞으로 새롭게 쌓을 친정엄마와의 관계는, 밍밍하고 싱겁지만 깔끔하고 담백해서 오래도록 생각나는 맛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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