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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짜증을 희석시키는 아주 간단한 방법

by 손나다


결론은 밥이다. 허무하게도 그렇다. 고작 밥이라고요?라고 되물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장거리 여행을 떠났던 남편과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이리저리 구경한답시고 오래 걸었던지라 다리는 끊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구경할 게 많아서 계속 걸어야 했다.



예전에 어떻게 만보 걷기 한답시고 100일 동안 매일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씩 산책했었는지 신기할 노릇이었다. 그땐 젊어서 그랬나.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아, 세월이여ㅡ



여행 떠나기 전 홈트하고 영어 방송을 듣겠답시고 새벽 5시에 일어난 것도 피로도에 한몫했다.



내 안에 원인 모를 짜증이 치솟았다. 남편 또한 장거리 운전을 해서인지 지쳐 있었다. 변명같이 들리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나는 운전 경력 20년 차이고 결혼 10년 차인데 남편은 결혼 후 지금까지 장거리 운전을 혼자 도맡아서 한다.



교대로 하자고 해도 졸음을 참아가며 휴게소에서 찬물로 세수하고 커피를 들이부으며 혼자 독박 운전을 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물으니 그냥 자기가 하는 게 속 편하다나. 그럼 둘째 아토피 때문에 수원 아주대 다닐 때는 날 어떻게 믿고 운전을 맡기냐고 물으니 그땐 선택의 여지가 없고 자기 눈에 보이지 않으니 괜찮다나.



이 정도까지 자신의 의견이 확고한데 조수석 생활을 즐길 수밖에. 나는 조수석에 있으면 잠이 드는 멀미가 있다. 물론 초반에 차 안에서 운전하는 남편에게 먹을 걸 입에 몇 차례 넣어주긴 했다. 하지만 그 정도면 나의 소임을 다한 거 아닌가. 조수석에 있다고 해서 끊임없이 옆에서 재잘거리는 것은 나의 역할이 아니다. 그냥 좋아하는 노래 틀어놓고 운전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어쨌든.



여러 관광지를 구경하며 약 세 시간 동안 걸었던 우리는 짜증과 피로도가 상당히 올라와 있었다. 거기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갔던 칼국수집은 내가 불호하는 멸치육수 냄새가 너무 진하게 나서 만족스럽지 않았다. 해물 칼국수인데 멸치육수 냄새가 나다니.. 이래서야 집에서 멸치 코인육수로 끓인 칼국수와 다를 게 뭐람? 난 해물에서 우러나오는 진하고 시원한 국물 맛을 기대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옮길 때 우린 서로에게 말투가 그게 뭐냐며 서로에게 짜증을 냈고 가벼운 말다툼을 했다. 일하시던 분들이 옆에서 쳐다보든 말든 서로 짜증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남편이 꼴도 보기 싫었다. 돌이켜보면 남편은 두 시간가량 독박 운전하고 짐 옮긴 죄밖에 없는데.



왜 자꾸 짜증이 치솟고 쓸데없는 부정적인 잡생각이 자꾸 올라오는 거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뾰족한 원인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생각을 멈추고 일단 숙소 도착하자마자 짐을 정리하고 아이들 목욕부터 시켰다. 그리고 나도 씻었다. 책을 좀 읽다가 졸음이 쏟아져서 한 시간가량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좀 기분이 괜찮아졌다.



남편은 저녁으로 먹을 음식을 사 왔다. 다 같이 숙소에서 족발을 먹었다. 남편이 사 온 족발은 만족스러웠다. 세트구성에 쌈채소, 막국수, 주먹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부분에서 흡족해지면서 1차로 마음이 좀 풀렸다, 족발을 다 먹어갈 때쯤, 하루 종일 남편과 날 괴롭혔던 원인 모를 분노와 짜증은 거의 희석되었다.



남편은 평소 쉬는 날이면 낮 12시까지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차려준 점심을 먹는 편인데 오늘은 여행 간답시고 아침 7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2시간 남짓 운전하고 3시간 동안 걸었으니 남편 또한 피로도가 상당했을 거다. 남편 또한 숙소에 도착해서 한 시간가량 낮잠을 잤다.



낮잠을 자고 맛난 저녁을 먹은 우리는 아까 어린애처럼 서로 짜증 낸 게 민망했는지 마주 보며 멋쩍게 웃었다. 다 먹은 뒤 함께 정리를 했고, 남편은 야구 중계를 보고 나는 방에서 책을 읽었다.



초반에 분노와 짜증을 희석시키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밥이라고 했는데, 살짝 정정한다. 만족스러운 맛난 밥이다. 왜 예전부터 사람들이 밥심으로 산다며 밥을 강조했는지 알겠다. 허무한 결말이지만 맛난 밥 한 끼가 모두를 구원한다.



자기 안에 원인 모를 짜증과 분노가 치솟고 이상하게 부정적인 감정이 자꾸 든다면 몇 가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잠은 충분히 푹 잤는지. 맛난 밥을 잘 먹어 줬는지.



인간은 얼핏 보기에 심도 있게 탐구해야 할 복잡하고 섬세한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이런 원초적인 것들에 휘둘리는 아주 단순한 존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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