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공원 여행기

어느 게으른 외출을 보고합니다.

by 손잎의 노래

#1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자주 그 기쁨을 잊어버리곤 하지요. 언제든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합니다. 오늘도 몇 번의 전화를 주고받으며 한참을 이야기했습니다. 까르르 웃기도 하고 가끔 눈물도 흘리면서 소소한 단편 오디오북 몇 편은 만든 것 같습니다. 스케일이 크거나 스펙터클 하지는 않지만 잔잔한 일본 소설 같은 이야기들. 초가을 바람을 닮은 다정한 사연들, 오늘도 그렇게 하루를 보냈습니다. 별일 없지만 편안하고 충만한 하루를 보고합니다.


#2

큰 마음먹고 외출을 했습니다.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가을 하늘이 내 작은 창문까지 기어이 찾아와 문을 두드립니다. 이래도 안 나올 거냐고 이렇게 날씨도 좋고 햇살도 좋은데 뭐 하고 있는 거냐고 자꾸 채근 댑니다. 나는 한 번 집에 들어오면 웬만하면 밖에 잘 안 나가는 은둔형 코쿠닝 족에 가깝습니다만, 오늘은 한가한 일요일 오전의 바깥 풍경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늘도 구름도 바람도 하릴없이 좀 늘어져 주말을 즐기고 있는지 구경해 보고 싶었습니다. 외출이라고 해봤자 몇 발자국만 떼면 도착하는, 집 앞 작은 공원에 나가는 일입니다. 그래도 집 가까운데 작은 공원 하나 있다는 것이 나 같은 게으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정자 두 개, 나무 10그루, 나무벤치 8개와 미끄럼틀이 하나, 운동기구가 3개 있는 작은 동네 공원입니다. 주변에 원룸촌이 있고 아파트가 있어 조용하고 가끔 잠깐 앉아 햇빛 쬐고 바람맞기 좋습니다. 일요일 아침 공원에는 아이들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고 백발에 보라색 옷을 입으신 할머니 한 분이 정자에 앉아 계셨습니다. 햇살은 아직 여름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아 열기가 남아 있어도 바람은 살랑살랑 청량한 맛에 슬슬 맞아 볼 만하겠습니다. 햇살은 살짝 피하며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앉습니다. 구름으로 거의 새하얗게 덮인 하늘은 간간히 파란 얼굴을 내밉니다. 오늘은 뭉게구름이 주인공입니다.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그 크고 풍성한 구름들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마치 우리가 어릴 때 어른들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큰 산처럼 생각하다가 가끔씩 웃거나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보면 놀랬던 것처럼. 그런 회상에 잠깐 빠져 있는 동안, 따뜻한 농담처럼 큰 산을 움직일 수 있는 건 강한 사랑과 믿음이라는 목소리가 지구 어느 편 교회에서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일요일 오전, 이렇게 세상의 누군가는 잠시 쉬고 누군가는 계속 살아가는 중입니다.




#3

나는 잠시 눈을 감고 크게 숨을 쉬어 봅니다. 오랜만에 내 몸 깊숙이 숨을 들이쉬어 내 온몸에 가을의 신선한 공기가 들어갈 수 있게 길을 열어 줍니다. 이제까지는 살갗으로만 가볍게 인사하다가 오늘은 더욱 깊게 가을을 들이마십니다. 이렇게 마음껏 한계 없이 공급받을 수 있다는 자체가 참 풍요롭습니다. 이 무색무취의 풍요와 자유를 이렇게 누려도 되는 것인지 믿기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얼떨떨하지만 그냥 즐기고 싶습니다.

숨 쉬는 기쁨. 깊게 숨 쉬는 기쁨. 깊게 숨 쉬는 것을 누리는 기쁨을 오늘 새삼 느끼게 되어 한동안 정말 숨만 쉬어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벌써 겨울 양식 채워 놓은 듯이 온 마음 뿌듯합니다. 일요일 오전 작은 동네 공원이 마치 교회가 된 것처럼 몽글몽글 투명한 은혜가 피어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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