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미안한 밤에는 전화를......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났어. 너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어. 너는 아마 누군가와 함께 있거나 잠들어 있겠지. 차마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했어. 미안해. 너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렇게 너에게 부치지 않은 편지를 쓰듯 이야기할까 해. 이런 건 괜찮겠지? 가끔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허락해 줄 거지?
조금 전에 엄마랑 통화를 했어. 너도 알지? 우리 엄마, 삶에 대한 열정도 노력도 나보다 훨씬 뛰어나시다는 거. 정말 부지런하고 깔끔하신 성격이라 오늘도 집안 정리를 많이 하신 모양이야. 그런데 집안 깊숙이 모아둔 엄마의 중요한 기록들, 평생 받은 상장들, 사회활동을 하시면서 정리해서 모아둔 자료들이 많았나 봐. 그걸 이제 버려야겠다고 하시는 거야. 나는 귀중한 자료들인데 왜 버리냐고 말렸지. 그런데 엄마가 그러시는 거야.
'네가 다음에 와서 한 번 봐라. 그러고 나서 버릴 거야. 엄마가 나중에 떠난 뒤에 이런 게 남아 있으면, 네가 얼마나 울겠냐'
전에 이런 말을 들으면 좀 짜증이 났어. 왜 이런 말을 벌써 할까? 자식 일부러 마음 아프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근데 지금은 그냥 울컥하네. 그만큼 현실적으로 더 다가와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더 철이 든 걸까? 둘 다인 것 같기도 해. 세월에 대해서는 이제 같이 늙어가는 나이가 되었다는 정도로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 하지만 엄마 나이 70대 중반이 되셨으니 마지막에 대해 생각하는, 그런 쓸쓸하고 담담해지는 마음이 나도 이제 이해가 되는 거 있지?
나보다 100배는 소녀 같고 잘 울고 잘 웃는 우리 엄마, 유난히 가을을 많이 타시는데 이번 가을에 또 얼마나 몸살을 앓으실까? 코스모스를 정말 좋아해서 보이기만 하면 손을 흔들고, 버스에 흘러나오는 가곡을 들으실 때 창가에 기대어 눈을 꼭 감으시는 모습이 참 순수하고 아름다워. 그렇게 아직도 생생하고 찬란한 감성을 가진 엄마가, 나이로 인해 가질 수밖에 없는 깊은 고독과 허무함은 또 얼마나 크실까? 생각하니 가슴이 막힐 듯이 먹먹해.
그동안 많은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는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어. 그땐 나도 너무 젊었고 바빴고 들떠 있었어. 날카로웠고 세상과 늘 싸웠어. 그땐 나만 아프다고 생각했었나 봐. 사람들을 돌아보고 사랑할 시간도 여력이 없었어. 이제는 사람들이 조금씩 보이고 이해되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아쉽다는 생각이 드네.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으로 미안함 천지야. 스치는 가을바람 한 자락에도 미안하고, 조용히 지즐대는 귀뚜라미에게도 미안하고, 깊어가는 초가을밤에도 미안하고, 나의 수없는 실수들, 그 실수들을 조용히 덮어주고 기다려준 모든 사람들, 특히 엄마에게 정말 미안해. 오늘은 어떤 원망도 없이 모두에게 미안한 밤이네. 그리고 정말 고맙고. 내 이야기 끝까지 들어줘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