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생활 계획표 짜기

생산적인 백수 생활 프로젝트

by 이은디

회사를 떠나기 2달 전, 5번의 미팅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아카데미” 라는 교육에 초대되었다. 세일즈와 마케팅팀의 일부 인원을 대상으로 했던 이 교육은 회사를 PBO (Project Based Organization) 로 탈바꿈하자는 목표 아래, 실질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 일이 많은 두 팀의 구성원들에게 프로젝트의 정의나 프로젝트 운영 툴들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를 테면, 프로젝트 개론이랄까?


대부분 참석자들은 이 초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일단 오늘 당장 해치워야 할 일들이 산적해 – 특히, 연말이라 매출과 예산 마감 업무가 많았다 – 교육 자체가 달갑지 않았고, 임원 보고와 서면 승인이 여전히 중요한 회사였기에 “프로젝트”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자유롭고 수평적인 분위기가 이 교육의 결실이 미미할 것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대변하기도 했다. 나는 이미 마음으로는 퇴사를 한 뒤라 그런 회의감이 덜 했고, 매일 듣는 단어지만 사실은 이해하지 못했던 개념을 배우는 게 흥미롭기도 해서 대학 초년생때 교양 수업을 듣던 마음으로 교육에 참여했다. 많은 이들의 예상처럼 이 수업에서 배운 걸 업무에 써볼 기회는 없었지만, 감사하게도 나의 백수 생활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프로젝트란 기간이 정해진 (보통 3-6개월 정도) 단발성 업무 과제를 뜻한다. 회사가 의도했던 PBO는 실무진들이 자발적으로 프로젝트 팀을 꾸려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그렇게 운영되는 다채로운 사업들로 회사를 성장시키는 조직이었다. 5시간짜리 짧은 교육이다 보니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는 이 정도였고, 그 외에 남긴 것은 구체적인 지식보다는 인상과 느낌이었다. 전 과정이 끝나고 내가 내린 결론은 프로젝트에는 1) 팀원들과 공유 2) 시간 관리 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사실 모든 팀 과제에 기본이 되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결론인데 가벼운 마음으로 임한 수업을 통해 들으니 이 단순한 교훈이 내 생각을 환기시켜 주었다. 특히 시간 관리 부분이 그랬다. 프로젝트 툴 대부분이 지연된 업무나 마무리된 업무를 효과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각 구성원의 업무 상황과 전체적인 타임라인을 관리하는 PM (Project Manager)은 프로젝트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이렇게 꼼꼼하게 진행 단계를 관리하는 프로젝트처럼 개인의 목표도 이렇게 적당한 관리와 압박을 더해주면 생산성이 훨씬 더 좋아질 수 있겠다 싶었다.


글을 쓰고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것은 3-4년 동안 내 새해 목표였지만 만족스럽게 수행한 적이 한 해도 없기에, 이번 백수 생활의 생산성 증대를 위해 프로젝트의 개념을 차용해보기로 했다. 6개월의 기간동안 내가 할 일과 작은 목표들을 정하고, 각각의 일에 할애할 시간들을 주차 별로 계획했다. 프로젝트 매니저를 고용할 수는 없으므로 목표를 최대한 단순하고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툴로 초등학교 방학 때마다 야심차게 그린 뒤 실천하지 않았던 “생활 계획표”를 활용했다. 다만, 나는 직장생활을 5년 넘게 한 만큼 스케치북 대신 엑셀을 썼다.


생활 계획표 4.PNG 생활 계획표 기본형 - 매 주 필요와 일정에 따라 생활계획표를 수정한다.


너무 과하게 계획을 세워 놓으면 계획을 달성하지 못한 나에게 자괴감을 느끼고 생활 계획표를 쳐다보기가 괴롭고 결국은 중도 포기할 게 분명했다. 생활 계획표 쓰는 걸 포기하지 않도록 주말은 쉬고, 일주일에 생산 시간은 30시간 남짓이 되도록 구성했다. 내가 어떻게 일주일을 보냈는지 남겨두기 위해서 친구들이나 가족과 약속도 별도 색상으로 기록하고, 일주일이 지나면 지난 한 주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를 남긴다.


생활 계획표 2.PNG 매 주 목표와 실제 달성 시간 모두 낮아지고 있다


초등학생 때 그랬듯 생활 계획표를 그대로 실천한 적은 한 주도 없지만, 일상을 가꾸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내가 만들고 내가 나를 평가하는 주관적인 도구지만, 생활 계획표를 기반으로 나를 채찍질하기도 하고 목표한 시간을 근접하게 달성한 날은 나름 열심히 하루를 보냈구나 싶은 성취감도 느낀다. 오히려 정말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자기와의 약속이 되니 못했던 일들을 속이고 숨기거나 잘한 일들을 과장할 이유도 없다. 계획성 없고 즉흥적인 성격을 은근히 자랑처럼 여겨왔던 나지만, 요즘은 혼자 만들고 지키는 주간 생활 계획 덕분에 스스로 사는 삶의 형태를 잡아가고 있다.




+) 3개월째 실천중인 생활 계획표의 근황

- 목표 시간의 최고 달성율은 83%이다.

- 재테크 목표 시간 달성율은 거의 0%에 가까운데, 아주 교훈적이게도 목표 수익률 역시 이와 비례하고 있다.

- 실제로는 평일에 못 채운 시간들을 주말을 통해 채울 때가 많다. 사실 거의 매주가 그렇다.

- 지난 달에는 감기 몸살 때문에 생활 계획표 작성을 멈추었고, 비로소 나는 백수가 된 듯한 해방감을 얻었다.

- 그 2주 동안 그간 변화가 없던 몸무게가 감량 목표치에 거의 도달했다. 역시 살 빼는 데에는 못 먹는 것 만한 게 없나 보다.

- 한 주가 끝나고 나면 지난 주의 결과와 코멘트를 꼭 언니에게 보낸다. 내가 일방적으로 보내는 코멘트에 언니는 별 말이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거 자체로 코멘트를 쓰는 게 더 재미있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1. 퇴사 기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