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우리 잔에만 레몬 없다?”
“어. 안 그래도 나도 그 생각 하고 있었어.”
오후 2시보다 더 햇볕이 뜨거운 오후 5시. 넓은 정원을 채운 손님들은 저마다의 차가운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레모네이드와 코카콜라, 그리고 얼음이 담긴 잔 2개를 받아올 때부터 무언가 허전하다 싶은 기분이었는데, 자리에 앉아서 보니 다른 이들의 유리잔에는 모두 들어있는 레몬 한 조각이 우리의 잔에만 빠져 있다.
“이거 인종차별 아니야? 아까 그 중국인 테이블도 레몬 있나 보고 올까?”
나는 짐짓 일어나는 척을 하며 친구에게 이런 시시한 농담을 던지고는, 같이 웃었다.
‘인종차별 아니야?’는 내가 프랑스에서 즐겨 사용하는 농담 중 하나다. 이 날처럼 나에게만 무언가가 오지 않거나 늦게 올 때, 상대방이 내가 하는 프랑스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 ‘보르도 (Bordeaux)’ 나 ‘코카 (Coca)’같은 아주 간단한 말인데도! –, 아니면 하하호호 농담을 하던 점원이 내 차례에 웃음기가 싹 사라질 때 나는 이 말을 하곤 한다.
물론 한국에서도, 프랑스처럼 유쾌하지 않은 서비스를 받는 일이 있다. 내가 먼저 왔는데 저 쪽의 주문을 먼저 받는다거나, 몇 번을 불러도 점원이 오지 않는다던가, 은근히 반말을 한다던가 하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유독 프랑스에서 슬퍼지는 것은 내가 이걸 한국에서처럼 꼬인 데 없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한국에서 나는 내가 받은 부당한 행동의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못생겨서? 내 옷이 오늘 누추해서? 아니면 내가 핸드폰 화면에 검은 잉크 얼룩들이 생길 정도로 박살이 나도 개의치 않는 게으른 사람이라서? 설마. 그저 내가 부당한 처우를 받았으니, 그에 적절한 대응을 할 뿐이다. “저희가 먼저 왔는데요.” 라고 말하거나 상대방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나도 퉁명스럽게 대꾸하거나, 점원 분이 오실 때까지 벨을 누르며 손을 들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내가 속한 집단 자체가 차별의 사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의 회로가 열린다.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갔던 십 수년 전은 인종 차별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 아마도 그때의 기억으로 생겨났을 이 생각의 회로는 직, 간접적인 경험들로 강화되어, 한국이면 점원의 실수로 넘겼을 사안에 대해서도 일단 상대방의 의도를 의심해 보게 만든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덧붙이자면 내가 이런 상황에 더 민감해지는 건, 나의 의식 깊은 곳에 존재하는 동양인이라는 자격지심도 한 몫을 한다.
물론 나는 한국인인게 무척 좋다.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자긍심도 높다. 세종대왕님도, 살수대첩도 자랑스럽고, 대중 문화와 과학 기술이 모두 융성한 나라라는 것도 뿌듯하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학창시절 내내 ‘세계사’라는 이름으로 서구 문명의 역사를 배우고, 미국 대중 문화에 영향을 받아와서 그런지 미국과 유럽에 대한 동경이 있다. 같은 외국인이라도 ‘백인’을 대하기가 동양인을 대할 때보다 어렵고, 그들은 무언가 “있어 보이는” 것 같다. 트럼프 같이 백인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을 보면 ‘잘난 것도 없으면서?’ 라고 코웃음을 치지만, 서양 세계에 오면 동양인이라는 사실에 위축되어 ‘실수할 수도 있지 뭐.’ 하는 여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 땐, 내가 인종 차별을 당할 일은 없다. 여전히 이민자의 구성비율이 현저히 낮으니 인종 차별이 주된 사회 담론이나 이슈가 되지도 못한다. 그러다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있는 프랑스에서 소수자의 신분이 되면, 인종 차별과 인종으로 야기되는 갈등을 일상에서 피부로 느낀다. 그리고 나 역시 백인, 흑인, 동양인 등을 가르고 줄세우는 전통적인 인종 차별적 사고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도 끊임없이 자각하게 된다.
오늘 아침에는 동네의 벤치에 앉아있다가 할아버지와 산책하는 삽살이 강아지를 만났다. 헥헥 웃으면서 달려오는 강아지가 귀여워 가까이 오면 인사라도 할 셈이었는데, 할아버지가 (나를 보더니) 강아지의 줄을 끌어 차도 옆 좁은 길로 방향을 튼다. 잠시 또 ‘인종차별주의자인가?’라고 생각했다가, ‘그냥 가던 길 가시던 거겠지.’하고 생각을 바꾼다.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는 건 이토록 다양한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무지와 악의, 인종차별의 역사에 버무려진 나는 오늘도 내가 당한 일이 인종 차별인지 아닌지를 번뇌하느라 헛된 에너지를 쏟는다.